그 순간 나폴레옹 솔로에게는 아무런 목적도 없었다. 누구를 속이려는 것도 유혹하려는 것도 아니고,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 감정이나 의도를 감추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도저히 참을 수도 없고 참을 이유도 없다는 듯, 아무런 꾸밈 없이 저절로 터진 웃음이었다. 평소처럼 잘 계산된 미소를 은근히 짓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터뜨렸다'는 표현이 꼭 어울리도록. 그렇게 실속 없는 웃음을 터뜨릴 때, 나폴레옹 솔로는 크리스탈 잔에 스파클링 워터가 찰랑찰랑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일리야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표정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신기하고 놀라운 마음이 든 일리야는 잇속이 드러나도록 웃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넌 대체 누구냐? 내 파트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영 다른 사람 같다는 뜻으로 한 재미 없는 농담이지만, 나폴레옹은 그 농담에마저 흔쾌히 웃어주었다.

그가 이토록 기분이 좋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작전의 성공에 대한 치하의 의미로 웨이벌리로부터 포상휴가 통보를 받은 것이 바로 반나절 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 저녁 기분 좋게 마시고 있는 버번 위스키의 위력도 한 몫 했다.

"휴가 처음 얻어 보는 사람 같군."

뒤늦게 조금 뾰족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일리야의 말은 결코 시비를 걸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 휴가란 좋은 것이지만 그렇게까지 좋은가, 하고 궁금해졌을 뿐이다. 나폴레옹은 이 말도 기분 좋게 받아들여 기꺼이 대답해 주었다.

"물론 CIA 시절에도 이따금 휴가가 있기는 했지. 터무니없이 부족한 데다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네만. 휴가 둘쨋날에 해변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가도, 명령이 떨어지면 다 집어치우고 다리에 달라붙은 모래알도 채 털어내지 못한 채 꽁지가 빠지게 쫓아가야 했거든. 그럴 때의 내 참담한 기분을 짐작하겠나? CIA에 일 시킬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정작 달려가 보면 별 일도 아니었어. 샌더스는 그저 내가 미웠던 게지."

나폴레옹은 조금 느슨해진 혀로 한여름의 새처럼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일리야는 뜨거운 해변에 나태하게 늘어진 나폴레옹의 젖은 허벅지에 달라붙은 황금빛 모래알들을 상상했다. 나폴레옹이 하는 말의 요점은 전혀 그게 아니었을 텐데도.

"자네의 올레그는 어땠나? 샌더스보다 그렇게 인심이 더 좋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일리야는 애매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은 상관이었다."

"비록 나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야 있지만, 그래, 그런 아주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나 보지?"

별로 우스운 얘기를 한 것도 아니면서, 나폴레옹은 또다시 헤프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폴레옹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술을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긴 했지만, 오늘처럼 취하도록 마음 놓고 마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토록 뻔뻔한 성격인 주제에 순진한 소년처럼 잘 달아오르는 뺨이 술 때문에 발그레했고, 말수는 늘었지만 말의 속도는 느릿하고 발음이 흐려졌다.

나폴레옹보다야 긴장을 덜 놓은 일리야는 신중하게 외교적인 대답을 했다.

"최소한, 나를 다른 요원들보다 특별히 더 나쁘게 대한 건 아니었지. 공정한 상관이었어."

일리야에게는 특별히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은 부친의 이야기를 꺼내 소위 '동기 부여'를 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올레그로부터 그런 모진 말을 들을 때마다 일리야는 다소 의문을 가지고 망설이던 지시사항도 불도저처럼 달려들어 해치워버리곤 했다. 아버지의 이름과 그의 불명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리야는 맹렬해진다. 옆도 뒤도 살펴보지 않고 치욕을 씻기 위해 그는 앞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적어도, 나폴레옹 솔로를 쏘라는 명령을 정면으로 어기기 전까지는 매번 그러했다.


술기운 때문에 조금 나른해졌지만 눈동자는 더 반짝이는 나폴레옹이 일리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네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일류 스파이가 되었는지 모르겠어. 도무지 거짓말을 하는 재주는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일리야는 대답 대신 그저 벌써 바닥을 드러낸 나폴레옹의 잔에 버번 위스키를 좀 더 따라주었을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일리야 쪽을 향해 새로 채워진 잔을 살짝 흔들었다.


"자, 우리 옛 상관들의 명예로운 단명을 위해 건배하세."


일리야는 피식 웃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나폴레옹의 평가를 딱히 부인할 셈은 아니다. 그러나, 남을 속이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 사실의 일부분만을 말하는 것. 일리야가 다소 서툰 것은 첫번째 방법 뿐이었다.


알코올에 저항력은 높지만 술을 나폴레옹만큼 즐기지는 않는 일리야가 어째서 이례적으로 먼저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 이렇게나 늦게까지 술상대를 해 주는지, 어째서 나폴레옹의 잔이 허전한 것을 잠시도 내버려 두지 않는지, 일리야는 그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일리야는 알코올의 도움으로 나폴레옹 솔로의 작고 얄팍한 자제력이 완전히 바닥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이 건방지고 방자한, 인내나 기다림이라고는 모르는 것 같은 미국인이 심지어 더 느슨해지기를 바라다니.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일리야는 자신이 나폴레옹에게 그런 것을 바라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인사답게, 나폴레옹은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듯 무얼 탐내는 마음을 도무지 숨기는 법이 없었다. 스쳐지나가는 아름다운 사람, 쇼윈도 너머 최신 유행의 멋진 옷, 귀금속으로 만든 커프스와 실크 타이. 그런 것들에 머무는 나폴레옹의 눈은 탐욕으로 반짝였고,


그리고 일리야는 그동안 믿고 있던 것과 달리, 욕심의 빛이 가득한 눈이라고 해고 해서 반드시 흐릿하게 번들거리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배웠다. 어떤 욕망을 느낄 때 나폴레옹의 눈동자는 생기가 넘치도록 맑았고, 기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 눈길을 받는 것이 차갑고 무감정한 무생물이 아니라면, 나폴레옹의 그런 관심에 공명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일리야는 너무 오래, 너무 정신없이 쳐다본다는 사실을 자각했으면서도 도무지 관찰을 그만두지 못했다. 덕분에 그는 나폴레옹이 무엇인가에 욕심을 느낄 때면 어떤 얼굴을 하는지 지나치게 잘 알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기꺼이 유혹당하고 유혹하는 모습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래도록 쳐다보곤 했으니까.


그랬기에 어느 순간, 나폴레옹의 그 반짝이는 욕심이 처음으로 자신을 향했을 때도 일리야는 즉각 알아차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의 나폴레옹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사진처럼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때 그들은 리츠 호텔의 식당에서 목표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겸사겸사 테이블 위에는 아침이 차려져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그답게도 푸짐한 영국식 아침식사를 주문해 놓았다. 마치 식사가 우선이고, 이중 스파이 체포작전 따위는 아침 식사 후의 가벼운 운동으로 여기는 것처럼. 달걀의 신선도와 익힘 상태부터, 호텔이 갖추고 있는 버터의 브랜드, 곁들일 잼의 가짓수, 소시지 종류까지 열심히 웨이터와 토론해서 정한 것이었다. 반면에 임무 중이라 그다지 식욕이 없는 일리야는 간단한 커피와 토스트만으로 이미 식사를 끝내고 신문을 읽는 척 하면서 나폴레옹의 등 뒤에 있는  입구를 감시하고 있었다.


마멀레이드를 듬뿍 바른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문 나폴레옹은 입을 꼭 다문 채로 참으로 맛있게 씹었다. 부풀어오른 볼과 열심히 움직이는 턱을 물끄러미 쳐다보노라니, 시선을 느낀 나폴레옹이 완벽하게 동그란 서니 사이드 업 계란의 노른자를 포크 끝으로 건드리다 말고 눈을 들어 일리야를 힐끗 쳐다보았다.


둘의 눈은 필연적으로 마주쳤다. 달콤한 것과 짭짤하고 기름이 풍부한 것을 한꺼번에 집어넣고 다람쥐처럼 부풀어오른 나폴레옹의 볼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흉한 것이 보일세라 꼭 다문 입술이 야무졌다. 느리게 일정한 간격으로 꼭꼭 씹으면서 나폴레옹은 일리야를 빤히 쳐다보았고, 일리야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폴레옹의 두 눈에 바로 그 찬란하게 탐욕스러운 반짝임이 찾아들었다. 음식 때문이 아니었다.


일리야 때문이다.


온전히 일리야를 향한 욕망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일리야는 속절없이 조금 발기했다.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십대 소년처럼.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 허벅지 위를 덮은 일리야는 급히 나폴레옹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그 머리 너머의 문 쪽을 노려보았다. 그 기세가 자못 흉흉했던지 나폴레옹은 타겟이 도착한 줄 알고 긴장하면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입술에 묻은 소금기를 살짝 핥으면서.


"아니, 더 먹어도 괜찮다. 아직 아니야."


일리야는 자기 목소리가 마치 신음처럼 들려서 움찔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는지 나폴레옹은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살짝 저은 후 다시 식사로 돌아갔다. 그가 갓 짜낸 오렌지 주스 잔을 입술에 대고 고개를 젖히자 길게 드러난 흰 목에서 도드라진 연골이 크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액체를 넘겼다.


그 순간부터 일리야의 머릿속에서도 이중 스파이 문제는 우선권을 상실했다. 그런 와중에도 일은 어찌어찌 잘 풀렸던 것 같지만, 일리야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그 작전의 경과가 아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느꼈던 혼란이었다.


처음에 일리야는 어쩌면 그날 밤 당장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니면 그 다음날. 적어도 일주일은 넘기지 않으리라는 것이 일리야의 합리적인 예측이었다. 나폴레옹은 무엇이 탐나면 긴 시간을 망설이는 법이 없었고, 일리야에게 접근하는 데는 별다른 장애물도 없었으니까. 매일 밤 일리야는 귀를 곤두세우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지 않을까 기다렸다. 그러면 일리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리야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림은 더욱 심장이 뛰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여러 달이 지나도록. 일리야는 처음엔 놀랐다가, 다음에는 혹시 그 날 나폴레옹의 눈빛을 잘못 해석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이어서 비참해졌다.


그러나 그 후로도 이따금 나폴레옹은 촉촉하고 반짝거리는 눈을 일리야에게 오랫동안 고정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일이 있었고, 그의 그런 행동은 최소한 일리야가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혹시 그날 리츠 호텔에서 일리야가 너무 빨리 시선을 돌리고 표정을 굳혔던 것이 나폴레옹에게 나쁜 신호로 보였던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뒤로, 일리야는 나폴레옹과 눈이 마주쳐도 점점 더 오랫동안 피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일리야는 그 즈음부터 이 미국인을 솔로가 아니라 나폴레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이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냉정한 거절은 하지 않았다.


이런 모든 상황, 은근한 시선 교환과 아주 자연스럽게 조금씩 달라지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나폴레옹 솔로가 극히 이례적인 자제력을 발휘할 셈이라면, 일리야는 그 자제력을 살짝 건드려 무너뜨려야 했다. 혹은 그가 그럴 수 있도록 핑계를 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의 첫키스에서는 진한 버번 위스키의 맛이 났다.







지난번에 쓴 '휴가 첫밤'이 자연스럽게 나폴레옹 쪽 입장에 치우쳤던지라 일리야는 뭔 생각을 했을까 하다가 썼습니다. 애초에 '휴가 첫밤'이 19금이었으니 더 쓰려면 19금이 되어야겠는데 19금력을 저번에 올인해서 더는 없어 바닥났어 여기서 안녕... 이 뒷얘기는 그냥 '휴가 첫밤'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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