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이 될 때까지 스몰빌에는 제대로 된 영화관이 하나도 없었다. 케네디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자동차 극장이 전부였는데, 스크린은 커다란 나무 판자에 흰 페인트칠을 한 것이었고 음향을 송출하는 주파수도 희미해서 카 오디오로 열심히 잡아 보아도 언제나 잡음이 끼어들었다. 최신작을 들여올 예산도 없어서 항상 개봉한 지 한참 지난 영화들만 상영하는 곳이었다.


클락 켄트는 그런 곳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4:3 비율의 작고 낡은 텔레비전을 통해 화면 일부가 잘린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집 벽보다 더 넓은 스크린으로 좌우가 긴 비율의 영화를 보았다. 그야말로 시야가 넓어지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니, 어쩌면 클락에게 있어서는 시야가 '좁아지는' 경험이라고 해야 더 옳은 말일 수도 있었다.

8번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클락의 시각은 미성숙한 두뇌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급격한 발달을 시작했다. 클락은 아주 어릴 때부터 예민한 청각 때문에 종종 두통을 겪었는데, 그저 매처럼 좋다고만 여겼던 시각마저 그 이상의 일을 하기 시작한 게 이 즈음부터였다. 시도 때도 없이, 어떤 예고도 없이 클락의 이상한 지각력이 쳐들어 왔다. 습격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날뛰는 감각이었다.

"가시광선" 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이 무렵부터의 클락에게는 틀린 것이 되었다. 클락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가시광선보다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을 볼 수 있었고, X-레이처럼 남들의 살갗을 뚫고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볼 수 있다'기보다는 억지로 보게 되었다. 그것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해서 클락은 수업조차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분필로 쓴 글씨를 보려고 하면, 칠판이 걸린 벽 너머의 교실에서 쪽지를 주고받는 아이들 모습이 보였다. 때로는 그 아이들의 뱃속에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온갖 장기들까지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켄트 부부는 아들을 위해 이것저것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세상 그 어느 육아 서적도 이 정도로 과도한 감각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8살짜리를 진정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심호흡과 함께 집중을 하는 방법만이 조금 효과가 있었는데, 슈퍼 지각력을 가진 8살짜리도 집중력은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도 잠깐일 뿐이었다.


켄트 부부가 어느 토요일에 일찍 저녁을 먹고 클락을 자동차 극장에 데려가기로 한 데 무언가 목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부쩍 우울해하는 아들의 기분 전환을 위한 것이었는지 클락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켄트 부부는 클락을 키우는 동안 단 한 번도 생각 없이 함부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


허름한 싸구려 스크린에 영화사 로고가 나오고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간 후, 별이 빛나는 밤하늘 영상이 영사되기 시작했을 때 클락은 스크린에 비친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멀리 펼쳐진 진짜 밤하늘과 옥수수밭을 보았다. 작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나도록 집중해야 클락은 화면 위에 펼쳐지는 영상의 줄기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곧 클락은 화면에 나오는 것이 우주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빛을 내뿜는 커다란 알처럼 생긴 우주선에서 아이 같은 크기의 그림자들이 내려와 호기심 어린 어설픈 몸짓으로 주변의 숲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외계인들.


클락은 이따금 꿈에서 이상한 세계의 풍경을 보았다. 그곳의 하늘은 지구의 황혼과도 다른 기이한 적색이었고, 땅은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했다. 쓸쓸하고 삭막한 광경이었지만 클락은 기묘한 그리움을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클락은 그것이 지구가 아닌 아주 먼 세계임을 직감했다- 저 외계인들도 그런 곳에서 왔을까?


그 때까지 클락은 외계인이 나오는 이야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에서 온 방문자들은 언제나 사악했고 지구를 차지하고 그 원래 주인들을 내쫓고 말살시킬 생각이었으며, 마지막에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 모두 쫓겨나거나 햇살 아래 녹아버리곤 했다. 소름끼치게 웃는 얼굴의 피부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안에는 끔찍한 괴물이 들어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클락은 가끔, 분홍색 살갗이 벗겨지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어쩌면, 그 아래에는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초록색 비늘이!), 작고 부드러운 자신의 손가락 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했다. 엄마 아빠에게조차 그런 생각을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러나 이 영화에서 외계인은 누구를 쫓는 것이 아니라 쫓기고 있었다. 목이 졸리는 고양이 같은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 없는 여러 인간들에게 무력하게 쫓겼다. 잔뜩 겁에 질린 채 사냥 당하는 작은 짐승 같았다. 클락은 깜빡 깜빡 스크린 너머의 옥수수밭과 스크린 위의 영상이 번갈아 보이는 시야로 열심히 영화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외계인의 애처로운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외계인을 홀로 낯선 세계에 남겨 둔 채 달걀 같은 모양의 우주선이 떠나 버렸을 때, 클락은 조금 훌쩍였다.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고, 품에 안은 팝콘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마사는 아무 말도 없이 클락의 어깨를 꼭 안아 주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째서 그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장면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고였다. 외계인이 길고 서투른 손가락으로 엘리엇의 무릎에 색색깔의 초콜릿 캔디를 한 움큼 올려 놓을 때 그랬으며, 외계인이 소년의 동작을 천천히 따라 할 때도, 고무찰흙으로 태양계의 신비롭고도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여 줄 때도, 처음으로 말을 할 때도, 친구들과 함께 날아오를 때도 그랬다.


그리고 엉엉 소리내어 운 것은 물론 E.T.와 엘리엇이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에서였다. 화면이 암전되고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가 되어서야, 클락은 영화 후반부를 보는 내내 스크린 너머의 옥수수들이 관람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가 좋았나 보구나, 클락. 조나단은 클락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눈가에 번진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빠도 이 영화가 마음에 든단다.


그렇게 조금씩 클락은 자신의 능력을 제어하는 법을 배웠다.


때문에 클락에게 E.T.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각별한 영화였다. 매번 볼 때마다 그 의미는 조금씩 변화했을지언정 한 번도 퇴색된 적은 없었다.


"그럭저럭 괜찮네."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본 브루스 웨인은 짧게 시들한 논평을 했을 뿐이었다.


셀 수도 없이 보고 또 봤건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엔딩 부분의 감동에 푹 젖어 있던 클락은 눈살을 팍 찌푸리고 옆을 쳐다보았다. 뭐 왜 뭐. 그 기세를 느낀 브루스는 심드렁한 눈으로 기꺼이 클락의 시선에 맞섰다.


브루스 웨인은 스스로 상상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의 머리는 실존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할 가능성이 적은 무언가를 헛되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가시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목적지를 향한 최단 거리를 계산하는 데 능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는 그에게도 상상력이 풍부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도 같았지만.


그러니까, 이 날이 오기 전까지 브루스 웨인은 30개의 은하계 너머에서 날아온 외계인과 나란히 앉아서 E.T.를 보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것을 느닷없이 던져주게 마련이고, 그래서 클락 켄트 / 칼-엘 / 슈퍼맨 /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외계인은 브루스의 글래스 하우스에서 물소가죽으로 된 어마어마한 가격의 소파에 푹 파묻혀 120인치짜리 초고화질 TV로 E.T.를 정신없이 보고 난 참이었다.


E.T.를 좋아하는 E.T.라니, 당연하다고 해야 할 지 우습다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군.


브루스는 눈썹을 찌푸린 클락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촉촉해져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폭발에 휘말려 수천 도의 순간적인 고열에 갑작스레 노출되어도, 궂은 날씨 속에 맨몸으로 음속 장벽을 돌파해도 깜짝 않던 눈이 심리적 동요에는 쉽게도 젖었다.


"어떻게 저 영화를 보고 고작 '그럭저럭'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클락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도전적으로 말했다.


"내가 당신의 30년 묵은 빈티지 애스턴 마틴을 보고 심드렁하게 '그럭저럭 괜찮네' 라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클락은 벽 너머로 얌전히 주차되어 있는 브루스의 차를 가리켰다. 브루스의 집은 온통 벽이 유리라서 클락과 같은 뛰어난 시력이 없어도 거실에 앉은 채로 바깥에 주차된 차를 볼 수 있었다. 브루스는 사랑하는 차를 힐끗 보며 클락이 말한 기분을 상상해 보았지만 특별히 느껴지는 바가 없었다.


"어떻긴 어때. 네 눈엔 그럭저럭인가 보다 하는 거지.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저 애스턴 마틴은 57년형이야. 그 해에 생산된 것 중 현재까지 가장 완벽하게 유지 보수 관리된 차지."


그러자 클락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말을 조금 바꿨다.


"그럼 내가 저 아래에 있는 배트모빌을 보고 '뭐 그럭저럭'이라고 평한다면?"


클락 켄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턱을 치켜들며 특유의 건방진 표정을 지었다. 하찮고 비루한 것을 보는 듯한. 이 외계인이 나의 배트모빌한테 뭐라고? 브루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 주먹을 불끈 쥐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죽인다."


클락은 비로소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런 거라구요. 저런 걸작을 보고 "그럭저럭" 이라니."


"괜찮은 영화야. 다만 이제 와서 보기엔, 난 너무 늦었다 싶은 거지."


클락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E.T.를 처음 봐요?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저 영화 개봉했을 때는 나도 부모 없이 영화 보러 극장 가기엔 아직 어렸지."


잠시 동안 이루어진 간단한 계산 끝에, 클락은 E.T.가 개봉했을 무렵에는 웨인 부부가 사망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게다가 웨인 부부는 아들과 함께 극장을 다녀오던 길에 목숨을 잃었다. 거기다 대고 엄마 아빠와 함께 봤던 영화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니. 클락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브루스, 미안해요."


브루스는 클락의 사과가 예의상 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클락은 자세마저 똑바로 고쳐 앉고는 브루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마치 어제 저녁에 비명횡사한 남의 부모를 함부로 언급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과했다. 반성중인 푸른 눈동자는 아직도 촉촉했는데 이제는 비단 영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야.


브루스는 이티의 붉게 빛나던 심장을 생각했다.


마지막에 엘리엇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외계인이, 그 때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손가락이 베였을 때의 감각이 같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을 생각했다.


아주 먼 곳에서 날아온 지적인 존재가 인간의 즐거움과 애정은 물론이고 감정적 고통까지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내용의 오래된 영화를 생각했다. 아직 스스로가 외계인인 것도 모르고 아직 누구도 잃어 본 적 없던 여덟 살 난 크립톤 인이 그 영화를 보며 울었던 것을 생각했다.


"엠앤엠 좀 줄까."


잔뜩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던 클락은 뜬금없는 제안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엠앤엠."


브루스는 다시 한 번 말하면서 크레딧이 아직 올라가고 있는 TV 쪽을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아, E.T.에 나온 초콜릿 얘기로군. 엘리엇이 E.T.에게 주고, E.T.가 엘리엇에게 주었던. 그렇게 두 세계의 만남이 시작되었지. 하지만...! 중요한 디테일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는 팬의 심정으로, 클락은 참지 못하고 지적했다.


"그거 엠앤엠 아니고 리시즈 피시즈거든요. 초코볼 구별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기업은 어떻게 운영한다는 거야."


"그런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라 좀. 외계인이라 그런가 눈치도 참 더럽게 없긴."


이 외계인 아직도 멀었구만 멀었어. 브루스 웨인은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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