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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프롬엉클] 존스 요원의 걱정거리

베를린 작전 이후 2년, 존스 요원에게 TMI 제공하는 일리야솔로


식당 문이 열리더니 한 줄기 바깥 바람이 들어왔다. 그 바람에 무언가 특이한 점이라도 있는지,  식당 안 사람들의 주의가 하나 둘 문간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쟁반 위에 접시를 쌓아올리던 웨이터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막 식사를 마친 손님도 감탄의 기색을 담아 입을 조금 벌렸고, 그 맞은편에 있던 일행은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돌려가며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려 했다.


 훈련받은 버릇대로 출입문이 잘 보이도록 위치를 잡고 있었던 존스는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다.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데다 점심 시간도 조금 지나 한산한 이 식당에 저 화려한 골칫덩이를 불러들인 게 바로 존스였으니까.


바깥의 신선한 공기와 함께 나타난 남자. 자기 눈 색깔이 유독 도드라지도록 챙겨 입은 완벽한 핏의 짙푸른 정장과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 모양, 당당한 태도. 바로 나폴레옹 솔로였다.


존스와 눈이 딱 마주친 솔로는 그렇지 않아도 시선을 사로잡도록 생겨먹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더니 한쪽 손을 들어올려 아는 체를 했다. 아주 날 좀 보라고 북을 치면서 다니지 그러나. 존스는 나폴레옹 솔로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이런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 쓸데없이 이목을 끄는 것이야말로 스파이로서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수없이 들어 왔건만, 나폴레옹 솔로는 그 금기를 깨는 데 일말의 주저함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존스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도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임무 중도 아니고,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외국도 아니니 솔로의 화려함이 그렇게 해가 될 일도 없었다. 스파이들에게도 조금쯤은 일상 생활이라는 게 있다. 지금 존스는 개인적인 이유로 나폴레옹 솔로를 만나려는 것이었으니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솔로가 예전과 전혀 다름 없는 화사한 얼굴로 화사한 행동을 하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게 생각만큼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존스가 솔로의 눈에 띄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후로 벌써 2년이 흘렀다. 그 동안 존스는 솔로의 안부가 많이 궁금했다. 아니, 실은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복잡한 경력을 자랑하는 나폴레옹 솔로의 이전 직장은 CIA, 지금도 존스가 몸 담고 있는 정보부였다. 당시 솔로는 오만방자한 태도와 규칙이란 규칙은 다 무시하는 기질 탓에 CIA의 그 누구와도 잘 지내지 못했지만, 존스만은 둥글둥글하고 순응적인 성격 덕분에 나름대로 솔로의 파트너로서 몇 달 동안 잘 견뎠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던 솔로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소속을 옮기게 된 것은 음흉한 놈들만 모인 첩보계에서도 가장 음흉한 능구렁이 알렉산더 웨이벌리의 개입 탓이다. 웨이벌리는 진영조차 따지지 않고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다루기 어려운 요원들만을 긁어모아 그 이름도 야릇하고 개념조차 황당한 엉클이라는 국제 첩보 기관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와 존스의 상관이었던 샌더스 부장은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국제정세 한 가운데에 위태롭게 외발로 서 있는 엉클이 3개월 이상 유지될 리 없다는 데 자신있게 저녁 내기를 걸었다.


그 때는 존스 역시 샌더스와 같은 생각이었다. 엉클이 너무 시간을 끌지 않고 적합한 임무 한두 개를 한 후 자연스럽게 해체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샌더스처럼 웨이벌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전 파트너가 걱정되었기 때문에.


솔로가 새로 모시게 된 상관 웨이벌리의 악명 높은 교활함도 교활함이지만, 베를린에서 이미 한 번 원수를 진 그 러시아 요원과 솔로가 어처구니없게도 한 팀 동료가 되었다는 점이 존스로서는 가장 큰 걱정이었다. 일리야 쿠리야킨, 성질도 과격하다는 평이던데. 심지어 성격이 느긋한 사람이라도 오래 참아주기 힘든 인간인 나폴레옹 솔로가 과연 그 러시아인의 미움을 사서 목을 졸리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그렇지만 존스가 그런 걱정을 한 지도 벌써 2년이나 되었고, 내기에 왕창 져서 저녁값을 꽤나 깨먹은 샌더스는 웨이벌리를 더더욱 싫어하게 되었으며, 아직까지 엉클의 해체 소식도 실패 소식도 나폴레옹 솔로의 비극적인 부고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동안 솔로와 존스는 간접적으로, 풍문으로, 그리고 어쩌다 유선상으로 안부를 주고받은 일은 있었지만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소식이 들릴 때마다 솔로가 무사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존스는 다행스러운 놀라움을 느끼곤 했다.


존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솔로는 식당 안으로 몇 발짝 더 들어섰다. 뒤이어 문이 다시 한 번, 이번엔 더욱 거세게 요동치면서 누군가 따라 들어왔다. 이 사람은 식당의 오래된 문틀 위쪽에 머리가 스칠 지경으로 키가 컸다. 실제로는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낯설지는 않다. 말인즉슨 존스가 CIA 문건에서 흑백 사진으로 본 적 있는 얼굴이라는 뜻이다.


솔로와 그 낯설지 않은 남자가 함께 테이블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도 존스는 미처 놀라고 떨떠름한 표정 수습을 다 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그것을 눈치 챈 솔로는 눈썹을 까딱였다.


"잘 지냈나, 존스. 갑작스럽게 인원이 늘게 되어 미안하군. 내 계획에도 원래 없었던 일이네만 이 친구가-."
 

"일리야 쿠리야킨."


쿠리야킨은 솔로의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존스를 향해 통성명을 강요라도 하듯이 차갑게 내뱉었다. 그는 곧이어 존스의 면전으로 커다랗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늘씬한 손을 불쑥 내밀었는데, 이 순간 존스는 자신의 순발력이 주로 나쁜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감사했다. 존스의 반응 속도가 빠른 편이었으면 아마 그 손에 한 대 맞을까봐 겁내는 듯이 화들짝 물러났을 것이다. 볼품없이 드르륵 의자 미는 소리를 내면서.


무뚝뚝하게 이름만을 밝힌 러시아인은 일말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존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압박했다. 존스는 잠깐 어떻게 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압박을 못이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손을 마주 잡고 말았다.


"존스입니다."


그래, 쿠리야킨은 러시아식으로 무뚝뚝할 뿐 괜찮은 인간일지도 몰라. 2년 동안이나 솔로를 살해하지 않고 참아 주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생각만큼 난폭한 성격은 아니라는 증거지.


그러나 러시아인이 먼저 제안한 이 겉모양만 멀쩡한 인사는 사실 힘겨루기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꽉 쥐어오는 쿠리야킨의 악력이 엄청나서 존스는 낑 소리를 낼 뻔했던 것이다. 있는 자존심을 다 동원해서 최대한 세게 마주잡아 봤지만, 쿠리야킨은 별 볼 일 없군, 하는 표정으로 얕보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존스보다 한 뼘은 더 위에 있는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그 순간 존스는 깨달았다. 존스는 쿠리야킨을, 쿠리야킨은 존스를 싫어하고 있으며 둘 다 딱히 그 사실을 숨길 생각도 이 관계를 개선할 의지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솔로는 옛 파트너와 현 파트너 사이에 오가는 따끔따끔한 신경전 따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듯이 쾌활하게 말했다.


"아마 자네들 구면일 거야, 어두운 데다 먼 발치에서 아주 잠깐 봤을 뿐이긴 하지만. 일전에 베를린에서 잠깐 만났었지."


"똑똑히 기억한다. 운전 솜씨가 좋은 친구였지. 특히 '후진'을 아주 잘 하던 걸."


쿠리야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존스는 식은땀이 다 났다. 베를린에서 존스의 후진 덕에 일리야 쿠리야킨은 지뢰밭에 떨어지는 불상사를 겪었었다. 존스는 꽉 깨문 입 안쪽,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건 솔로가 시킨 거야! 다 솔로가 시킨 거였다구!


"원 참, 옹졸하게 그런 지난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솔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쿠리야킨을 긁어댔고, 존스는 쿠리야킨에게 아프도록 꽉 잡힌 손에서 핏기가 가시고 목덜미가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솔로를 째려보았다. 지금 저 힘센 손에 잡혀 있는 게 자기가 아니라 이거지. 정말로, 그 동안 솔로는 도무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쿠리야킨은 화풀이로 존스의 손을 으스러뜨리는 대신 무사히 놓아주었고, 솔로는 다들 엉거주춤 서 있던 상황을 가장 먼저 정리해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존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앉았다. 악수하느라 얼얼해진 손을 주무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쿠리야킨은 어느새 달려온 웨이터가 2인 예약인 줄 알았다고 어물어물 사과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그가 가져다준 의자를 가뿐히 들어올려 솔로 바로 옆으로 놓고 앉았다. 원형 테이블을 삼등분한 자리가 아니라 어색할 만큼 솔로 옆으로 바싹이다.


일리야 쿠리야킨이 대체 왜 옛 동료들간에 식사 한 번 하는 자리에 부득불 끼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존스와의 친목 도모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건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등받이에 깊숙히 앉은 자세와 일말의 우호적인 감정도 비치지 않는 굳은 표정만 봐도 뻔했다.


쿠리야킨은 자기 앞에 놓인 메뉴는 집어들지도 않고 몸을 옆으로 약간 기울이더니 솔로가 펼쳐든 메뉴를 옆에서 같이 들여다보았다. 솔로의 물 먹은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맣게 반들거리는 머리카락과 쿠리야킨의 바스락거리는 밀짚 같은 머리카락이 살짝 스칠 지경이었다.


메뉴를 같이 들여다보기는 하지만 쿠리야킨은 음식에 대해 별 말이 없었는데, 솔로는 멋대로 손을 들어올려 웨이터를 부르더니 자기 몫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주문에 이어 쿠리야킨을 위한 주문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해냈다. 애꿎은 존스만 쿠리야킨의 눈치를 보았지만 쿠리야킨은 솔로의 주문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먹는 것 따위 소화만 시킬 수 있으면 불평하지 않는다는 불굴의 인민 정신인가.


그 뒤로도 쿠리야킨은 내내 말이 없었다. 번쩍이는 눈으로 솔로와 존스를 빤히 쳐다보며 대화에 끼어들지도,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다 작은 빌미라도 잡으면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엎을 것 같은 냉랭한 분위기였다.
 

아무리 현재로서는 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덩치 좋은 러시아인이 내내 입을 꾹 다물고 가늘게 뜬 눈으로 위아래로 훑어보는지라 존스는 뒷골이 다 당기고 소름이 돋았다. 이 놈 혹시 기회를 봐서 내 커피에 독이라도 타려는 것 아닌가? 불안해진 존스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한 번 떠 보려고 했다.


"당신이 이 러시아 친구와 한 팀이 되었다기에 정말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 첫 만남이 좋진 않았잖아요. 그런데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아, 처음에야 굉장했지."


솔로는 싱긋 웃었다.


"죽는 줄 알았다니까. 베를린의 그 요란한 밤이 지나고 아침에 딱 마주쳤는데, 날 보자마자 한 마디 말도 없이 대뜸 멱살을 잡더니 꼼짝 못하게 목을 졸랐지 않겠나. 이 친구 어찌나 힘이 센지 눈앞이 다 캄캄해졌네.”


말의 내용이야 심상치 않았지만 솔로의 태도는 재미있는 일화라도 추억하는 것처럼 가벼웠고, 얼굴은 그간 했던 존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뺀질뺀질 아주 피부에서 광채가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존스는 발끈해서 솔로 옆에 앉은 러시아인을 노려보았다.
 

팔짱을 낀 채 자기 팔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 러시아인의 손은 방금 존스도  몸소 겪은 바와 같이 그야말로 솥뚜껑만 했다. 저런 손으로 동료의 목을 조르다니?
 

눈이 마주치자, 쿠리야킨은 질세라 존스를 향해 눈썹을 홱 치켜올린다. 그의 오른쪽 눈가에 자리 잡은 흉터가 빛을 받아 희게 도드라졌다.
 

존스는 애초에 왜 솔로가 이 걸리적거리는 거대한 러시아인을 데리고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존스가 알고 싶었던 것은 옛 동료의 안부지, 새 파트너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솔로는 약속에 없던 자기 파트너를 뒤에 데리고 나타났다. 원래 솔로는 혼자 다니는 것을 선호하는데도.
 

혹시, 솔로가 본인 의사에 반해서 이 러시아인에게 항상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저렇게 바싹 옆에 붙어 앉아서 솔로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는 거겠지? 시간이 갈수록 존스의 불분명했던 의심이 점점 구체적으로 형태를 잡아갔다.
 

솔로가 정보기관에 몸을 담게 된 것부터가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을 존스도 잘 알고 있었다. 능구렁이로 유명한 웨이벌리와 잔인한 러시아인 사이에서 솔로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지 존스는 걱정이 되었다. 솔로는 제대로 된 요원도 아니잖아. 나야 그래도 착실하게 솔로를 동료 대접 했지만 저 외국인들이 솔로에게 무슨 짓을 할 지 알 게 뭐람.
 

그래서, 중요치 않은 수다를 떠는 내내 존스는 쿠리야킨이 자리를 뜨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한 시간 이십 분 만에 쿠리야킨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서자마자, 존스는 재빨리 의자를 끌고 솔로 곁으로 바싹 당겨 앉았다.


“솔로, 정말로 괜찮아요?”


“왜 갑자기 들이대고 속삭이지, 존스?”


인상을 찌푸린 솔로는 자기의 눈부시게 하얀 셔츠 깃에 흙탕물이라도 튈까봐 걱정하듯이 몸을 뒤로 뺐다. 걱정해주는 사람 속도 모르고. 존스는 또 확 기분이 상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로 왈가왈부 할 상황이 아니었다. 러시아인이 돌아오기 전에 물어 봐야 했다.


“정말 괜찮냐고요. 엉클 사람들이요.”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모르겠는 걸.”


“혹시 당신에게 부당행위나 가혹행위를 한다거나.”


“그런 일 없는데. 그보다 저리 좀 떨어지지 않겠나, 자네 방금 먹은 닭비린내 나네.”


솔로는 딱 잡아뗐지만 그게 진실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존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 급히 갈겨썼다. 내용인즉슨 이러하다.


 <혹시 여기 도청 장치가 있어요?>


‘도청 장치’ 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어 강조한 존스는 솔로의 손에 펜을 쥐여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솔로의 손목, 칼처럼 다려진 셔츠 소매 아래로 울긋불긋한 멍자국이 살짝 드러난 것을 보았다. 얼핏 봐도 세게 쥔 손자국 또는 꽉 묶었던 자국이 틀림없었다. 분명 솔로는 최근에 별달리 격한 작전이 없었다고 했다. 그럼 저런 짓을 한 건 누구란 말이지. 존스가 그것을 보고 더 심각한 표정이 된 것을 눈치챘는지, 솔로는 조금 말려올라갔던 소매를 끌어내렸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일리야가 그런 작은 기계들을 병적으로 좋아하기는 해. 가능성은 있지.”
 

그러나 솔로는 펜을 잡고 악당들을 고발하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쉿, 쉿! 존스는 기겁하며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 앞에 갖다댔지만 솔로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래도 존스는 꿋꿋이, 1초 1초 점점 더 강해지는 확신을 담아 꾹꾹 눌러 썼다.
 

<저 러시아인이 당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거 아닙니까?>
 

“으…음. 괜찮아.”
 

솔로는 대답했지만 그 대답이 한 박자 느리다는 것을 존스는 알아차렸다. 게다가 차마 '아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고 '괜찮다'니 수상한 대답이었다. 그러고 나서 솔로는 어딘지 먼 산을 바라보며 존스의 눈을 피하는 것이다. 그 뻔뻔한 솔로가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정말로 걱정이 된 존스는 솔로의 귀 가까이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나한텐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솔로. 당신이 뭐라든 절대 웨이벌리나 쿠리야킨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샌더스 부장님께 잘 말씀드려 볼게요. 만약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거라면 당신을 엉클에 임대한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CIA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부탁을.”
 

“미스터 존스.”


그 때 무겁고 낮은, 외국어 억양이 섞인 목소리가 존스의 이름을 불렀다. 소름이 끼쳐 등을 뻣뻣이 굳힌 존스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러시아인이다. 안개처럼 소리없이 나타났다.
 

아무리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1분 만에 화장실을, 그것도 사냥에 나선 고양이처럼 조용하게 다녀올 수는 없을 것이다.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해 놓고 사실은 근처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함정에 빠졌군. 존스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일리야 쿠리야킨은 커다란 손을 내밀어 존스의 뒷덜미를 붙잡고 솔로에게서 단호히 떼어냈다. 마치 세 살 난 어린애처럼 달랑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켜진 존스는 러시아인의 활활 불타는 파란 눈동자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일리야 쿠리야킨은 마치 부모의 원수라도 만난 듯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가.”
  

“수, 수작이라니?”
  

존스는 조금 더듬고 말았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되물었다.
  

“너야말로 솔로에게 허튼 짓을 하고 있잖아. 솔로를 때리지? 줄곧 감시하고 있지? 그게 파트너에게 할 짓인가?”
 

러시아인은 조금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6피트 5인치짜리 덩치와 힘센 주먹은 주눅이 들 만큼 크지만, 금발머리에 금빛 속눈썹을 가진 젊은 얼굴은 꽤 수려해서 이런 식으로 눈썹을 찌푸리고 생각에 빠지면 어쩐지 로맨틱한 소설 속 주인공처럼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듯한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폭력 성향이 있는 이 러시아인은 존스의 가여운 옛 파트너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솔로가 제법 재수가 없긴 해. 그래도 사람을 때리면 쓰나!


무언가 생각 끝에 러시아인은 폭탄처럼 말을 던졌다.
 

“감시하는 것이야 나의 나폴레옹이 워낙 엉덩이가 가볍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지.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은 마라. 나폴레옹은 그 가벼운 엉덩이를 내 손바닥으로 찰싹거리도록 맞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똑똑히 듣기는 했으되, 존스는 솔직히 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머리에 입력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앉아 있던 솔로는 무슨 소린지 대단히 잘 알고 있는 모양으로, 아름답게 반질거리는 이탈리아산 구두를 들어 러시아인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자네 미쳤나? 그런 소릴 왜 존스한테 해?”
 

“이게 무슨 소리지?”
 

뭔가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끄집어내졌다는 걸 안 존스는 쿠리야킨의 냉랭하고 동요 없는 얼굴과 어째 뺨이 분홍빛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한 솔로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의 나폴레옹’ 이라니?”
 

‘내 파트너’도 아니고. 러시아인이 영어가 서툴러서 그런 걸까? 러시아어로는 아무 것에나 내 것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걸까? 그보다, 솔로가 이 러시아인에게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했단 말인가? 5년 동안 CIA에서 일하면서 솔로는 CIA의 그 누구에게도 ‘에이전트 솔로’ ‘미스터 솔로’ 이상으로 친근한 호칭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존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인은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
 

“말 그대로인데. 나의 나폴레옹이다. 아무리 네놈이 수작을 부려도 네놈에겐 전 파트너일 뿐이지. 바로 지금 나폴레옹은 내 것이란 말이야.”
 

“일리야…….”
 

나폴레옹 솔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떨구었다. 존스는 이 뻔뻔한 도둑이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꼴은 처음 봤다. 예전에 존스에게 화려한 범죄행각과 난잡한 여자관계로 인해 추궁당했을 때도 뻔뻔하게 눈만 찡긋했던 나폴레옹 솔로이다. 그런 솔로가 말 그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신음 섞인 목소리로 러시아인에게 호소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일리야. 존스는, 존스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네. 존스에게는 귀여운 약혼녀도 있다고…….”


“그런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내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너에게 찰싹 달라 붙어서는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손을 만지작거리던데. 무슨 비밀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는 천천히 물어보기로 하겠다. 자기 곁으로 돌아오라고 애틋하게 호소하는 건 나도 얼핏 들었지만.”
 

맙소사. 러시아인의 머릿속에서 괴상하게 해석된 자기 행동을 돌아본 존스는 귀에서 증기를 내뿜을 뻔 했다.


“일리야. 좀.”
 

“일어나라, 카우보이. 아무래도 너는 오늘 엉덩이를 맞아야겠다. 모든 걸 다 솔직히 털어놓을 때까지.”
 

“아, 일리야, 제발 좀.”
 

솔로는 아직도 얼굴을 감춘 채 거의 흐느꼈다. 그런 솔로의 허리에 손을 집어넣은 러시아인은 어안이 벙벙해진 존스를 끝까지 노려보며 솔로를 잡아 일으켰다.


욕심스럽게 허리를 감아 자꾸만 끌어당기는 손을 솔로가 찰싹 매섭게 때렸다. 그러자 쿠리야킨의 커다란 손이 움찔 하고 떨어져 나가나 싶더니 솔로의 동그랗고 풍만한 엉덩이 한 쪽을 재빨리, 그러나 도저히 못 보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한 번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존스가 입을 딱 벌리는 순간, 러시아인이 음산한 미소를 보내왔다. 그 미소에 깃든 소유욕과 승리감, 경고를 단박에 알아들은 존스는 소름이 끼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베를린에서 그토록 악착같이, 토끼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솔로를 쫓아오던 저 러시아인. 솔로는 아직도 그의 집요한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솔로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존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난 이제 저놈들에게 신경 끊어야겠어.



트위터 @trinketbo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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