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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리그/웨인클락] 좋아하지 않지 않아

망한 고백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외계인이 브루스 웨인에게 이런 요지의 말을 한 것이 벌써 여러 번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클락 켄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사실을 클락 켄트는 잘 알고 있다.' 두 가지 명제가 결합된 말을, 클락은 반은 유감이고 반은 농담인 듯이 희미한 미소를 띤 채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정말로 상심한 듯이 침울해져서 말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클락이 다양한 상황에서 불쑥불쑥 내뱉는 이 말은 브루스의 기분을 효과적으로 상하게 했다.


오늘 이 말에 담긴 것은 브루스를 향한 원망이다. 그렁그렁해져서 브루스를 올려다보는 눈망울에 억울함과 배신감이 가득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브루스는 뜨겁고 묵직한 덩어리가 오장육부를 뒤집고 입까지 왈칵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신호였다.


사실 브루스 웨인의 인내력은 예전에 바닥났다. 클락이 맨 처음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던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이 날 좋아해서 되살린 게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


브루스는 속내를 털어놓는 대화에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니지만, 당시에 스테픈울프가 일으킨 지구 종말의 위기가 급속히 진행되는 중만 아니었더라도 시도나마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다급하고 너무 곤란하고 너무 중대한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지는 와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자 브루스는 당황한 나머지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렸다. 


"난... 그게... 아닌 건... 아니......."


더듬거림과 우물거림, 통제를 벗어나 얼빠진 표정, 배경으로는 무언가 폭발하고 무너지고 박살나는 소리.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럴 때는 주로 뜬금없는 한밤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루스 웨인은 체력단련실로 달려내려가 근육이 찢어지도록 운동을 했다. 그 쪽팔림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는 것을 막으려면 아주 혹독한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단락된 이상, 클락이 던진 명제들을 새삼 진지하게 부정하는 것에는 이상하게 민망한 감이 있었다. 게다가 어쩔 수 없지, 라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할 때의 클락은 왠지 항상 바빴기 때문에(스테픈울프의 얼굴에 지금 당장 주먹을 날리지 않는다면 세상이 멸망한다든가, 곧 페리 화이트의 데스크로 달려가지 않으면 해고당한다든가) 브루스의 대답을 똑바로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 비록 그런 사소한 이유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까지 좀 더 확실하게 오해를 풀어 주지 못한 것에는 브루스의 잘못도 조금은 있다. 하지만 클락 켄트가 한 번 내린 결론은 좀처럼 바꾸려 들지 않는 완고한 외계인이라는 게 훨씬 더 근본적인 잘못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그런 복잡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락 켄트는 다 쓴 걸레마냥 딱딱한 바닥에 불편하게 널부러져서는 숨 넘어갈 듯이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클락이 이런 볼썽사나운 꼴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클락의 바로 곁에 217kg하고도 103.55g의 크립토나이트, 말하자면 현재까지 그 존재가 확인된 지구상의 크립토나이트 전부가 사악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날 미워할 줄이야."


이 와중에도 마지막일지 모르는 숨결에 브루스 웨인에 대한 원망을 담고 있다니. 그러나 정말 억울한 건 브루스였다. 분명히 말했잖아. 배트 케이브에 있는 모든 것을 허락 없이 손 대지 말 것이며, 특히나 그 중에서도 이 문만은 절대 절대로 열지 말라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에도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대형 금고가 궁금하기야 했겠지. 차라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솔직히 말해 줬어야 했나?


시작은 렉스 루터의 탈옥이었다. 이미 루터는 복잡한 흉계를 꾸며 클락을 죽이려고 한 바 있었고, 일시적이나마 성공하기까지 했다. 얌전히 감옥에 있던 루터가 갑자기 탈옥했다는 소식을 듣자 브루스는 소름이 쫙 끼쳤다. 그가 완전히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계속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더 나아가 아예 그것이 탈옥의 목적이라면? 브루스는 곧 전 세계를 뒤져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법 불법도 따지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크립토나이트를 모아들였다. 단 하나라도 감시를 벗어나 루터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모든 크립토나이트는 철통같은 보안 하에 브루스의 손아귀에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브루스는 이 이야기를 알프레드 외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는데, 첫째는 클락을 걱정해서 이렇게까지 했다는 걸 알리기가 민망해서였고, 둘째는 브루스가 아무리 선의를 설명해도 클락이 크립토나이트 수집의 목적을 오해할 것 같아서였다. 보라, 역시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저 원망의 눈초리! 자기 뒤통수를 치기 위해 언제나 준비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브루스에게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자 어떻게 해서든 열어 본 것만 봐도 클락이 브루스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첩첩이 쌓인 오해의 더미라니.


그렇다. 크립토나이트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금고 문을 몰래 연 것은 클락 켄트 본인이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배트케이브 구석에 이중으로 숨겨진 금단의 문을 억지로 열어본 결과로 쓰러져 죽음을 당하기 일보 직전이다. 자업자득의 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래 놓고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도대체 하지 말라는 짓을 기어코 저지르고야 마는 게 기자인 탓인가, 외계인인 탓인가, 아니면 그저 클락 켄트라는 개체가 이 모양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내가 너를 싫어하냐고? 미워하냐고?


브루스는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지만, 지금 막 하려는 말이 이 상황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클락은 바닥에 치욕적으로 엎어져 우중충한 쑥빛이 된 채 표정은 생리적 괴로움으로 잔뜩 쪼글쪼글했다.


조금이라도 상황의 부적절함을 줄이기 위해, 브루스는 무거운 납으로 된 문을 뻥 걷어찼다. 정신없는 클락조차 화들짝 놀랄 만큼 쾅 소리를 내며 금고가 닫힌다. 그래. 일단 다량의 치명적인 물질을 클락에게서 차단했다. 다음으로는, 엎어진 클락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다.


됐어. 훨씬 나아.


클락의 호흡이 (당장 꼴딱 넘어가지는 않을 정도로) 한결 편안해지고, 자세도 (멱살을 잡힌 덕분에 간신히) 두 발로 일어선 상태임을 확인한 다음, 브루스 웨인은 윽박질렀다.


"똑바로 좀 들어! 굳이 따지자면 난 너를 좋... 좋......"


크립토나이트의 영향에서 벗어난 클락이 녹초가 되어 편히 기절할 것 같은 낌새를 보였기 때문에 브루스는 클락의 멱살을 거세게 흔들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말할 셈이었다.


"좋아하지 않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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