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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프롬엉클/일리야솔로] 고백

누가누가 더 눈새인가



뉴욕의 동쪽 강가에 면한 국제 연합 본부라고 하면 누구나 위풍당당하게 높이 솟은 초현대식 빌딩의 UN 본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곳으로부터 조금만 더 걸어내려가면, UN본부와는 반대로 야트막한 벽돌 건물로 지어졌으며 진짜 주요 시설은 땅 밑에 납작 엎드리듯 숨은 형태의 또다른 국제 연합이 존재한다. 바로 스파이들의 연합인 엉클이었다.

1층에는 장사가 영 안 되는 양장점이 자리잡았고,  2,3층은 통조림을 공급하는 상회가 세를 낸 건물 지하에 온갖 기밀 정보와 무기와 스파이들이 들고 나는 수상한 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다. 그리고 3층에 사무실을 둔 톰슨 상회 주인 톰슨 씨의 진짜 직함과 이름이 국제첩보기관의 국장 알렉산더 웨이벌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꼭 그만큼으로 적었다.

나폴레옹 솔로와 일리야 쿠리야킨, 그리고 개비 텔러는 이 기묘한 첩보기관 엉클의 창립 요원이었다. 때문에 웨이벌리만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위아래가 없는 다국적 요원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대접받는 위치였고, 안전상 나쁘다는 일리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칙칙한 지하가 아니라 2층에 있는 사무실을 차지하려는 나폴레옹 솔로의 야망도 그런 그들의 위치 덕분에 관철되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오직 웨이벌리의 노련한 발바닥뿐이었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10월 말의 이른 아침, 대외적으로는 톰슨 상회의 해외무역 담당 직원인 일리야 쿠리야킨이 출근했을 때 물류 담당 직원 나폴레옹 솔로는 웬일인지 그보다 더 먼저 출근한 상태였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활짝 편 자세로 사무실 창 밖을 내다보며 아침 커피를 마시고 있는 솔로의 당당한 모습을 보면 작은 상회의 직원같지 않은 건 물론이고 전직이 도둑이라든가 현직이 스파이라든가 하는 미심쩍고 수상한 경력을 가진 남자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계절에 꼭 맞게 따스해 보이는 최신 유행 트위드 수트를 입고 아련하게 밖을 내다보는 솔로의 모습은 마치 잡지에서 잘라낸 커피 광고 같아 보였다. 밖에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 궁금해진 일리야는 솔로의 등 뒤에 비스듬히 서서 어깨 너머로 덩달아 바깥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갑자기 싸늘해진 가을 날씨에 트렌치 코트 깃을 세운 사람들이 옷자락을 날리며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을씨년스럽고 삭막한 도시의 가을이군. 저 깨진 보도블럭 좀 봐. 치우지 않은 낙엽들은 어떻고. 미국인들은 자랑할 게 돈 뿐인 주제에 그나마도 옳은 곳에 제대로 쓰지도 못한단 말야. 일리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볼품이라곤 없어.

"벌써 크리스마스가 가까웠군."

일리야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폴레옹 솔로는 갑작스레 속삭였다.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일리야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달력을 보든 바깥 풍경을 보든 바로 알겠지만 지금은 10월이고 크리스마스는 아직 멀었다. 이게 무슨 암호인데 내가 까맣게 잊었나? 솔로가 아무리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광고 문구라도 읊듯이 분위기 넘치게 말한다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리야는 정직하게 대꾸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말 그대로야. 크리스마스가 다 됐다고."

"이제 겨우 10월 말이다."

"멋진 크리스마스를 보내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딱 좋은 시기야."

나폴레옹 솔로는 꿋꿋이 우기면서 미소 띤 얼굴로 눈을 감더니, 고개를 젖히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동작을 하고는 말했다.

"난 벌써 크리스마스 냄새를 맡을 수도 있어. 계피와 생강 냄새, 갓 베어 온 크리스마스 트리 냄새, 눈 내리는 겨울 공기의 쨍한 냄새."

매사 왜 저렇게 연극하듯이 움직이고 말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일리야는 덩달아 코를 킁킁거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성의있게 의견을 존중하려 노력해 봐도 역시나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었다.

"나는 커피 냄새밖에 안 난다."

그리고 네가 뿌린 복잡한 프랑스 이름의 향수 냄새도. 일리야는 이 부분은 혼자 머릿속에서만 중얼거렸다. 솔로가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솔로가 그렇게 심호흡을 할 때마다 감은 눈꺼풀에서는 짙은 속눈썹에 가늘게 떨리고, 그렇잖아도 높게 솟은 탄탄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으며, 그 광경은 썩 나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가깝든 아니든 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멋진 추억을 만들려거든 이맘때부터는 준비를 해야 해. 예를 들어, 뉴욕에서 가장 훌륭한 프랑스 요리를 하는 뤼테스에 두 사람을 위한 크리스마스 이브 특별 코스를 예약하려면 사실 이미 늦은 감이 있다네."

그 때쯤 해서, 솔로는 눈을 반짝 뜨고 일리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직도 영 감을 잡지 못한 일리야는 솔로를 마주보았다.

"여전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내가 12월 24일 저녁 8시 뤼테스에 테이블을 하나 맡아 놨다는 말이야. 쉽지 않은 일이지. 60석 밖에 안 되는데 뉴욕의 700만 인구 모두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어 해. 일 년 전에 예약하는 사람도 있단 말야."

적당하게 싸늘한 사무실 공기와 더운 커피 향, 솔로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마구 뒤섞인 가운데 갑자기 일리야는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솔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이브, 뉴욕에서 가장 좋은 레스토랑에 2인석을 예약해 놨다는 말을 단지 자랑하려고 꺼낸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이 이런 문제에 둔한 편이라는 것을 일리야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아마 그래서 솔로는 몇 개나 힌트가 겹친 말을 꺼낸 거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일리야도 잘 알아들었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 전날 밤, 훌륭한 식사, 둘을 위한 테이블.

갑자기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일리야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것은 기습이다. 솔로가 좋아하는, 전혀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찌르고 드는 날카로운 기습이었다. 일생 처음으로 일리야는 이런 기습에는 까짓 것 져 줘도 되지 않은가 생각했다.

"좋다.

너무 두근거린 나머지 일리야는 솔로가 아직 그 특별한 식사를 함께 하자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얼른 대답부터 해버렸다. 마치 나폴레옹 솔로와의 식사권을 놓고 700만 뉴욕 시민 전체와 선착순 경쟁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이번에는 솔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할 차례였다.

"응?"

"아니, 계속 말해도 좋다는 뜻이다, 카우보이.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일리야는 급히 수습하고 입을 꽉 다물고 기다렸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어서 말해라, 나폴레옹 솔로.

햇볕이 드는 창가인지라 솔로의 눈이 파랗고 아름답게 반짝였고, 일리야는 그 눈을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눈가에 살짝 주름이 지도록 매력적인 눈웃음을 치며 솔로가 말했다.

"자네 이름으로 예약해 두었어."

일리야는 혀를 깨물어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드디어, 드디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이럴 때 괜한 소리를 했다가 분위기를 깰까 두렵다. 둘 뿐인 사무실, 창밖의 가을 햇살은 따스했고 차가운 바람은 맑고 투명한 창문 안으로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아름다운 색깔로 물든 가을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창밖에서 춤을 추었다.

멋진 가을이군. 크리스마스가 가깝든, 그렇지 않든.

"나폴레옹."

일리야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저 나폴레옹 솔로의 이름만을,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그 거창한 이름을 속삭이고는-일리야는 자기 목소리가 너무 조급하고 목마른 사람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조금 걱정했다- 손을 뻗어 솔로의 소매 근처에 가볍게 손을 댔다. 마치 귀부인을 에스코트하려는 예의 바른 청년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호감이 넘치는 제스쳐였다.

"그래, 친애하는 페릴."

솔로는 싱긋 웃고는 나직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올해가 가기 전에 개비에게 멋지게 고백을 하게."

일리야는 입을 딱 벌렸다. 귀에서 쩡 하는 환청이 들렸다. 아니, 와르르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솔로의 팔에 대고 있던 손을 불에 덴 듯이 확 떼어낸 일리야는 외쳤다.

"뭐라고?"

"뤼테스의 좋은 좌석에서 크리스마스 코스를 먹고 난 뒤라면 목석도 녹일 수 있을 거야. 멋지게 차려입고 개비를 데려가서 함께 맛있는 걸 먹고, 자네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란 말야. 자네는 사람 패고 물건 부수는 것에나 시원시원하지, 2년이 다 되도록 이게 뭔가? 내 원 답답해서."

솔로는 핀잔을 주었다. 일리야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직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도 못했다. 솔로가 일리야와 개비에 대해 계속 뭐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종알거리는 동안, 핵폭탄 같은 좌절과 끔찍함은 천천히 찾아와 일리야의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을 꽉 눌러 터뜨렸다.

"나폴레옹 솔로."

일리야는 입술을 떨며 마침내 말했다. 솔로는 떠들던 것을 멈추고 말간 얼굴로 대답했다. 응?

"네놈은 최악 중의 최악이다."

때맞춰 운치라고는 한 줌도 없는 가을 바람이 그들 앞에 있는 유리창을 마구 흔들었다. 와르르르. 꼭 두 사람을 비웃는 사악한 웃음 소리 같았다.

말로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었다면 솔로는 일리야의 말에 난도질을 당해서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만큼 진심이 담긴 맹비난이어서 솔로는 충격을 받았다.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할 만큼 일리야가 상처받은 점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솔로는 살아 오면서 남에게 상처를 준 일이 제법 많았지만, 대부분은 일부러 마음을 먹고 철저히 의도했을 때의 일이다. 이번처럼 좋은 뜻으로 한 일이 완전히 역효과가 나서 본의 아니게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솔로가 당황한 마음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일리야의 코끝은 분홍빛이 되었고 점점 더 색깔이 짙어지고 있었다. 반면에 너무 꾸욱 다물어 말려들어간 아랫입술은 윗니로 꼭 깨물고 있기 때문인지 희게 빛이 바랬다.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의 눈동자는 솔로를 똑바로 쳐다보며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 불을 끄기 위해서인지 눈의 점막 안쪽으로 물기가 돌았다. 솔로는 주춤주춤 물러나면서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뭐가 문제야? 지금 일리야는 날 죽이고 싶은 걸까? 그거야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니까 이번에도 잘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설마 울려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자 뒷목이 싸늘해지고 뱃속의 내장이 쏟아질 것처럼 울렁거렸다. 솔로는 누가 우는 걸 보는 것이 질색이었다. 게다가 그 우는 사람이 하필이면 일리야라고 생각하자 왠지 더욱 끔찍했다.

"왜, 왜 그러지, 그 식당을 싫어하나? 프랑스 음식이 문제야? 파리에 갔을 땐 자네도 개비도 꽤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어찌나 당황했는지 솔로는 말을 다 더듬었다. 러시아에서는 식사 예약을 대신 해 주는 것이 장갑을 면상에 던진 것과 비슷한 뜻이란 말인가?

아직도 문화 차이와 사고방식 차이가 때때로 문제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일리야와 개비, 솔로가 만난 후로 벌써 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강제적으로 마음에 안 들게 시작한 파트너쉽이었지만, 이제 솔로는 엉클에서 일하는 것을 내심 좋아하게 되었다. 이 기관의 동료들도 좋아한다. 동료라니, 심지어 마음에 드는 동료라니. 2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엉클이 삐걱거리는 공조에서 제법 잘 돌아가는 국제 첩보기관이 되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는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일리야와 개비의 관계였다. 솔로는 답답하고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어떻게 청춘 남녀가 호감을 가진 지 2년이 되도록, 매일같이 함께 여러 나라를 쏘다니거나 같은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고 함께 세상을 구하면서도 제대로 사귀지도 못할 수가 있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딱 3일 내로 어떤 형태로든 진전을 보거나 아니면 깨끗이 그만둬 버리는 직선적 연애 스타일을 고수하는 솔로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조바심이 다 나는 일이었다. 아주 먼 옛날(2년 전이지만 연애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솔로에게는 너무나 먼 옛날처럼 생각되었다), 일리야에게 개비의 허벅지에 찬 트랙커를 살펴볼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자리를 피한 솔로는 혼자 발코니에서 로마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생각했었다. 아무리 스트레스 많은 상황에서 만난 관계라 해도, 아무리 저 키 큰 러시아인이 뻣뻣하고 말솜씨가 없다 해도, 저 정도 분위기면 1주일이면 되겠지? 아니, 스트레스 많은 상황이면 오히려 더 빨리 진전될 수 있어. 사흘이면 될 거야.

그러나 무려 2년이었다.

그 동안 개비는 몇 번 남자친구를 만들었다가 헤어지곤 했지만, 일리야는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솔로가 알기로는. 역시 개비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도 못하다니.

영 글러먹은 일리야 대신, 솔로는 노력했다. 작전상 필요할 때면 꼭 일리야와 개비가 약혼지간이든지, 부부지간이든지, 아니면 남매라든지, 어떻게든 같이 있을 만한 역할을 하도록 유도했다. 거대한 남자와 자그마한 여자로 이루어진 스파이 커플이 전세계를 주무른다는 소문이 퍼질 때쯤 되자 그 짓도 어렵게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솔로는 되도록이면 낭만적인 장소에서 일리야와 개비가 단둘이 있을 만한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작전 중에도 별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은근히 밀어주는 것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둘 사이는 전혀 진전이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일리야의 욕구불만도 쌓이는지 요즘 들어 일리야의 작전 스타일은 점점 더 난폭해지고 있었다. 솔로는 이제 새해가 오기 전에 둘 사이를 진전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약간 주제넘은 짓을 하고 만 것이었다.

오래된 짝사랑을 고백해 보라며 등을 떠미는 오지랖 넓은 동료인지 원수인지가 짜증날 수도 있겠지. 일리야도 나름의 고백 계획을 짜 놨을지도 몰라. 그런데 내 마음대로 식당을 예약해서 가라고 명령하니까 화가 난 걸까. 그렇다고 나보고 최악 중의 최악이라니?

어쨌든 솔로는 해명을 해야만 했다.이대로 이 커다란 러시아 친구가 울음을 터뜨리도록 둘 수는 없었다.

"일리야. 나는 결코 자네를 놀리거나 비웃으려는 게 아니야. 이젠 한 발 나갈 때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지. 게다가 개비는 최근에 그 선생과 헤어졌다네, 자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충심으로 하는 말인데 이번이 기회야."

일리야는 눈을 감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느라 가슴과 배가 부풀어올랐다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조금 진정됐는지 눈을 뜬 일리야는 꾹 눌러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폴레옹 솔로."

"말해보게."

솔로는 무슨 말을 하든 듣고 조언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상냥한 얼굴이었다.

"대체 어째서 내가 개비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건가."

"그걸 모르는 게 바보 아니야? 티가 안 난다고 생각했던 건가?"

솔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네는 처음부터 개비에게는 터무니없이 물렀지 않아?"

"내가 개비에게 무르게 굴어서라고?"

일리야는 숨을 훅 내쉬더니 이를 갈았다.

"네놈이 어딜 가든 총조차 빼들지 않고 내 뒤에 쥐새끼처럼 숨어다니도록 내버려 두는 건 뭐라고 생각했나? 작전 중에 목표물도 아닌 보석을 주머니에 집어 처넣는 파렴치한 불법행위를 보고도 묵인한 건 뭐였을 것 같아? 폭탄과 맞닥뜨렸을 때 널 감쌌던 건 뭐였지? 네가 약을, 술을, 음식을 잘못 먹고 기절할 때마다, 네 그 먹보 돼지처럼 자제력이라고는 없는 무거운 몸뚱이를 둘러메고 도망치느라 망친 작전이 몇 개인가? 감사는 커녕 욕을 먹어가면서도 악착같이 트랙커를 붙여 놓고 네놈이 사고를 칠 때마다 늦지 않게 쫓아가 난장판을 수습한 건 다 뭐라고 생각했어?"

한참 말로 두드려 맞은 솔로는 잠시 침묵했다.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에 매가 더 아팠다. 눈동자를 이쪽 저쪽 초조하게 굴린 끝에 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야 모두 고맙게 생각했... 하긴 자네가 내게도 다소 무르게 굴긴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일리야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간절히 답을 원하는 것 같은 그 눈빛 때문에 궁지에 몰린 솔로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그러면, 자네가 물렁하게 구는 건 그냥 동료에겐 다 그런다는 뜻이야?"

그 말을 듣더니 일리야는 말없이 갑자기 손을 떨기 시작했다. 내가 이번에도 틀린 건가, 솔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들고 있는 소서 위에서 커피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런, 내 손도 떨리잖아. 아냐, 나는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다고. 솔로는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지난 2년 내내 애인도 안 만들고 주말이며 명절이며 데이트도 없이 혼자 음침한 표정 짓고 있었던 건 왜지. 짝사랑을 해서가 아닌가? 나는 짝사랑이라는 건 해 본 적 없어서 잘 몰라."

일리야의 떨리는 손은 이제 바들바들의 단계에서 부들부들 와들와들 단계로 진행했다. 그 모습을 흘깃 본 솔로는 우선 마구 달그락거리는 깨지기 쉬운 커피잔부터 창틀에 내려놓고 필사적으로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좀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고백을 하란 말이야. 사랑한다고 진심을 털어놓고, 개비가 싫어하지 않으면 손도 잡고 그것도 나쁘지 않거든 키스도 하고...... 자연스럽...게....... 아니, 주제 넘었다면 미안하네."

말을 하면 할수록 일리야의 표정이 점점 더 무시무시해져 정말 살해당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솔로는 재빨리 태세를 전환하고 사과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자네와 개비를 좋아해. 두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단 말이야. 요즘들어 부쩍 자네가 더 괴로워 보여서. 어쨌든 미안하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면 나는 이제 상관하지 않......"

"상관 있다."

솔로가 슬슬 이만 꽁무니를 뺄 태세를 취하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일리야는 양손을 들어 솔로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 꽉 잡혀서 팔이 아프고 옷이 구겨질 것 같았지만 솔로는 쫄아서 아무 말도 못했다.

"완전히 대단하게 밀접한 상관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네가 문제다, 나폴레옹 솔로."

솔로는 기함했다.

"내가 왜? 오해 마! 나는 개비한테 아무 생각 없어! 물론 개비를 좋아하고 아끼지만 연애감정 같은 건 없단 말이야. 그런 게 있었으면 내가 지금까지 가만 있었겠나? 난 결코 자네처럼 답답한 성미가 아니,"

그 때 일리야 쿠리야킨은 이를 한번 악물더니 자연스럽게 솔로의 말을 잘라먹고 키스를 했다. 이 상황에서 그 행동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하면 솔로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기라도 하듯이 자연스러웠다. 순간적으로 혹시 입술로 패려는 건가 하고 솔로는 비이성적인 공포를 느꼈지만, 언제나 조금 온도가 낮은 일리야의 입술이 솔로의 커피향 묻은 뜨거운 입술 위를 문지르는 움직임은 아무리 일리야라도 사람을 죽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솔로는 너무 놀란 나머지 신음도 거부의 말도 아니고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헉 소리를 냈으며, 일리야는 또 자연스럽게 솔로의 입 안으로 급격히 훅 빨려들어가는 공기와 함께 혀를 밀어넣었다. 일리야의 혀가 솔로의 혀를 한 번 두드리고 슬쩍 포옹한 후 또다시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평소 솔로의 분류에 따르자면 이건 열여섯살짜리나 할 키스 수준이었다.

키스의 수준이 어쨌거나 너무 놀란 솔로는 일리야가 자기 입술로 부벼서 만들어놓은 모양 그대로 애매하게 입을 벌리고 일리야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솔로의 얼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충격받은 표정 그대로인데다 핏기도 몽땅 빠져나가 창백한지라, 일리야는 새롭게 상처받았다.

"정말로 전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단 말이지. 온갖 잘난 척은 다 하고 사람 마음 주무르는 것에는 전문가인 척 하더니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었단 말이지. 그렇게... 나한테 아무 생각도 없었단 말이지."

일리야는 쏟아냈다.

"2년 동안이나."

일리야가 꽉 붙잡고 있지만 않았으면 정말로 솔로는 품 속에 손을 집어넣어 리볼버를 꺼내 자기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버렸을 것이다. 일리야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거의 굴러나올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울지 말게."

느닷없이 키스를 당해서 숨이 넘어가도록 놀란 것은 솔로였지만 달래는 것도 솔로였다.

"난 자네와 개비가 행복했으면 했지 울리고 싶은 생각은 정말로 없었어. 그렇게 눈물을 글썽거리면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단 말이야. 지난번에 가까운 사람을 울렸을 때 나는 그 날이 저물기도 전에 인터폴에게 체포당했었지."

"너는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

일리야는 훌쩍이며 말했다.

"계속 그 따위로 못돼게 굴다간 지옥에 떨어질 거야."

"그래, 내가 지옥에 떨어지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나?"

솔로는 조금 웃었다. 일리야는 더욱 서러워졌고 결국에 눈물이 한 방울 굴러나왔다. 솔로는 손을 들어 그 눈물 방울을 닦아냈다. 일리야는 체온이 낮은 편이지만 눈물 방울만은 뜨거워서 솔로의 손가락 끝을 달구었다. 일리야는 항의했다.

"그런 것으로 내 기분이 나아질 리가 없잖아!"

오, 일리야. 솔로는 손을 들어 일리야를 끌어당겨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게 하고는 다정하게 등을 토닥였다.

"자네 정말 나에게는 많이 무르군."

솔로는 나직한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도 자네에겐 너무 무른 것 같아.

"그렇지만 자네가 내게 키스하고 싶어할 줄이야. 전혀 몰랐네."

"도대체 어째서? 어떻게 모를 수가?"

"어째서냐니...? 아무튼 전혀 예상을... 대체 언제부터 그랬나? 일주일 전? 한 달 전? 설마 두어 달??"

일리야는 안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호기심을 느낀 솔로가 고개를 갸웃하고 지켜보는 사이, 일리야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무언가 얄팍하고 조그맣고 구깃구깃한 것을 꺼냈다.

색종이였다.

붉은색이다. 반짝이는 가루가 묻어 있었다. 원래는 화려해 보이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네 귀퉁이가 모두 닳았다. 연약한 종이를 계속 가지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억이나 하는지 모르겠군."

일리야는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솔로는 기억했다. 기억해낸 정도가 아니다. 솔로는 처음 그것을 보던 날 느꼈던 이상한 기분이 와락 다시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발끝과 손가락 끝이 얼었다가 풀리는 것처럼 간질간질하고 욱신욱신했다. 심장이 전보다 꽉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힘차게 펴지는 것을 반복하며 평소보다 세게 피를 뿜어냈다.

이건 어쩌면 정말로. 솔로는 신음했다.

"설마 정말로 그게 그 때 그건 아니겠지. 벌써 1년 하고도 한참 더 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솔로가 기억해내자 비로소 일리야도 조금 침착해져서 말을 받았다.

"세상에나."

솔로는 숨을 들이쉬었다. 사실은 솔로도 일리야와의 사이에 흐르던 기류를 잠깐 다르게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니, 그런 '순간', 어쩌면 '순간들'이 있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까. 스치듯이 애매하게 지나치곤 했던 그 느낌이 가장 강렬했던 때는, 그러니까 오래 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그 날 솔로와 일리야는 이미 추적자의 냄새를 맡고 도망쳐 버린 탄도미사일 설계도 절도범의 아지트를 수색하던 중이었다. 텅텅 빈 방 몇 개를 빠르게 훑은 솔로는 유일하게 잠겨 있던 방 문앞에 이르렀고, 이 방 안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당연한 결론을 내렸다. 도구 두 개로 단 13초만에 방문을 연 솔로는 방 한가운데로 망설임 없이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대체로 비어 있는 방 안 널찍한 탁자 위에 놓인 묵직한 물건을 흰 식탁보가 덮어 가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찾는 것은 두루마리 형식으로 말린 커다란 설계도이긴 했지만 이건 마치 초대라도 하듯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이었고, 일리야와 솔로는 둘 다 호기심이라면 인류 평균치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다.

의견 교환을 할 것도 없이 일리야가 달려들어 식탁보를 홱 잡아당기자 그 아래에서 드러난 것은 아뿔싸, 누가 봐도 완전히 폭탄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조잡하게 만든 뇌관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고 전선은 대충 엉킨 사제 폭탄. 꼴에 눈에 잘 띄도록 커다란 타이머까지 있었는데 거기 쓰인 숫자는

0:07

럭키 세븐이네. 너무 적은 숫자였고, 솔로는 아주 잠깐 동안 그게 7분이라는 뜻이기를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한 번 깜빡이는 동안에 숫자는 0:06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젠장. 뒤돌아서 뛸까? 몇 발자국이나 갈 수 있지? 크기가  상당한데 위력이 얼마나 될까? 솔로가 멍하게 생각하는 동안, 일리야는 움직였다. 우선 그 망할 폭탄을 집어들려고 애를 썼다. 창 밖으로 집어던지기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지만 폭탄은 아주 무거운 원목으로 된 탁자에 땜질이라도 해 놓은 듯이 붙박혔고 탁자는 다시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소용 없는 씨름을 하는 사이에, 0:03.

솔로가 주춤,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서는 그 순간 일리야가 솔로를 덮쳤다. 숨이 턱 막히고 폐가 오그라들면서 솔로는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기절하겠군, 하고 생각했지만 일리야의 손이 머리 뒤를 감싸고 있어서 뒷통수를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 두 사람분의 몸무게가 실린 등이 바닥에 닿는 충격은 작지는 않았지만 멍과 며칠간의 근육통 이상으로 나쁜 일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카펫 위에 뻗은 솔로를 일리야가 그대로 끌어안았다. 온 힘을 다한 포옹이었고, 솔로는 일리야의 몸이 자신을 최대한 덮어 보호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이불 같았다. 일리야는 눈을 꽉 감고 있었지만 솔로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였다.

"일리....."

절체절명의 순간에 솔로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놀라움 같기도 하고, 안타까움 같기도 하고,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같기도 하고.

펑,

그리고 아주 경쾌하게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둘의 위로, 팔랑팔랑, 색색깔의 종잇조각들이 날아 내려왔다. 솔로는 카펫 위에, 테이블 위에, 온 몸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키고 있는 일리야의 머리카락 위에 종잇조각들이 살포시 나부끼며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이 설계도 절도범은 도둑이지 테러범은 아니니까. 그리고 추적하면서 느낀 바에 따르면 장난기도 제법 있는 것 같았고.

그러나 일리야는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된 것 같았다. 눈을 꽉 감고, 솔로를 사력을 다해 끌어안은 채 그는 여전히 참혹한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 솔로는 이상한 기분으로 일리야의 목덜미에서 나는 옅은 땀냄새를 맡으며 일리야의 얼굴을 보았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내던진 얼굴이었다. 너무 꽉 감은 눈가에서 흰 흉터가 도드라졌다. 이건 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페릴."

솔로는 안간힘을 쓴 끝에 일리야에게 꽉 안긴 팔 하나를 빼냈다. 안쓰럽게 잔뜩 찌푸려진 일리야의 눈가 주름을 펴줄 듯이 매만지며 솔로는 웃음을 터뜨렸다.

"일리야, 눈 좀 떠 보게. 다행히 우리 둘 다 아직은 안 죽어도 되는 것 같으니까."

일리야는 그제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솔로는 일리야의 귓가와 머리카락 사이에 걸려 있는 빨간색 종잇조각을 하나 떼어내 보여주었다.

"장난인가 봐."

일리야는 그 때까지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훅 들이켜더니 온갖 빛깔의 종잇조각으로 난장판이 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국도 지옥도 아니고 피 한 방울 튀지 않았고, 어린애들 폭죽에서나 날 것 같은 가벼운 화약 냄새만 나는 방 안에서, 솔로는 색색깔의 종이들 속에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웃음을 띤 채 일리야의 몸 아래에 누워 있었다. 대단히 충격받은 표정으로 일리야는 솔로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진정해, 괜찮다니까."

솔로는 반짝이가 묻은 붉은 종잇조각을 일리야의 눈 앞에서 흔들었고, 일리야는 천천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번쩍 하고 정신이 들었는지, 일리야는 바닥에 솔로를 내버려두고 벌떡 일어났다. 종잇조각을 움켜쥔 그는 몸에 붙은 종이들을 다 떨어낼 정도로 격한 동작으로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 빌어먹을 놈을 꼭 잡아 족치고 말겠어. 일리야는 소리쳤고, 솔로는 종잇조각들 사이에 혼자 남은 채로 여전히 이상한 기분에 젖어 일리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일리야는 자기 몸을 방패로 삼아서라도 솔로의 생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어했던 걸까? 제대로 판단을 내릴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한 일리야의 선택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아니면 러시아에서 세뇌될 만큼 받은 훈련이란 다 이런 건가? 솔로는 한동안 꽤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어째서인지, 뻔뻔한 솔로도 차마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일리야는 드디어, 솔로가 품어 온 의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깨달은 건 그 때였어. 내가 너를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게다가 죽지 않았다는 걸, 죽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 색종이에 파묻힌 채로 너에게 키스하고 싶어져서 더는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쩐지......"

솔로는 탄식했다. 그러자 일리야의 억울함이 돌아왔다.

"역시 알고 있었으면서! 눈치 챘던 거지?!"

"알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좋으면, 어째서."

솔로도 조금 억울해졌다.

"그 뒤로 내가 자네를 몇 번이나 내 방에 초대했는데 다 거부했잖아? 내 방에서 샴페인 좀 마시겠나? 싫으면 위스키? 몇 번이나 물어 봐도,"

솔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지 않았잖아?"

이따금 축배를 들 일이 있을 때면 패턴은 항상 비슷했다. 가장 넓게 마련인 솔로의 방에서 술판을 벌인다. 돈은 결국 웨이벌리가 낼 것이기에 더 술맛이 좋았다. 수다를 떨고, 웃고, 놀리다 보면 밤은 깊어지고 개비는 잠이 든다. 그러면 일리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비를 소중하게 안아들고 방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다. 술판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 한 가지가 더 있다. 솔로는 개비를 안고 방을 나서는 일리야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개비를 방에 데려다 주고 나면 돌아와서 한 잔 더 하지 않겠나? 자네나 나나 아직 좀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양하겠다."

차가운 투는 아니지만 언제나 딱 잘라서 일리야는 거절했다.

그러면 솔로도 두 번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로 잠자리에 들지는 않고 홀로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조금은 더 기다렸다. 그런 새벽이 세 번, 네 번, 다섯 번. 몇 번인지 정확히 다 기억할 수도 없다. 오늘은 돌아와서 한 잔 더 하지 않겠나?

일리야는 한 번도 그러겠다고 한 일이 없다. 나중에라도 마음을 바꿔 솔로의 문을 두드린 적도 없었다. 솔로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여러 날에 걸쳐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솔로도 더는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닌 건 아닌 거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일리야는 입을 딱 벌렸다. 얼굴이 새하얘졌다가 곧 다시 달아올랐다.

"나, 난 작전 중에는 과음 안 한다."

"그래, 그래서 보통 작전 끝난 날에 물어봤었는데 그래도 오지 않았잖아?"

이쯤 해서는 솔로도 자기가 처음 계획한 것보다 집요하게, 일리야가 오지 않은 이유가 뭔지 자꾸 추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좀 원망하는 것처럼 들리려나?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일리야도 완전히 말려들어 갑자기 잘못한 기분에 휩싸인 나머지 좀 더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 과, 과음을, 단 둘이서 한밤중에 과음하면 정말로......"

일리야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정말로 키스해 버릴 것 같아서......."

솔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그러라고 초대한 건데 오지 않았잖아? 그래서 역시 개비를 짝사랑 하나 보다 했지."

"말을 하지! 좀 더 확실하게 말을 하지!"

일리야가 부르짖었다. 기나긴 고뇌와 좌절의 나날이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너는 정말 버릇이 엉망이다!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권해 보고 반응이 없다고 이내 포기해 버리다니? 그런 주제에 나한테는 고백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들어?"

"나는 그렇게까지 안해도 다들 알아서들 내 침대로 오기 때문에. 원래 내가 변덕이 심하고 뭘 어렵게 얻는 걸 귀찮아하잖나. 그러니까 도둑이지."

"정말이지 매사 날로 먹으려고 드는군. 도대체 샴페인을 같이 하자느니 하는 말이 어떻게 구애가 된다는 말이냐. 못 알아들은 내가 문제가 아니지!"

"글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만 말해도 다들 잘 알아들....."

일리야는 갑자기 손을 들어 솔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손으로 솔로의 눈앞에 검지손가락을 세워 든 일리야는 엄중하게 경고했다.

"내 앞에서, 너의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하지 마라. 다시는. 알겠지?"

치미는 화를 누르려다가 일리야는 문득 다른 쪽으로 생각이 닿았다. 그 생각이 나자 솔로의 입을 막았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입가에도 힘이 풀려서 일리야는 부드러워진 얼굴로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면, 거절당했다고 생각한 게 나만이 아니었군. 그럼 짝사랑을 한 게 나 혼자가 아닌 거야."

"뭐, 짝사랑이라니? 난 그런 건 평생에 전혀 도무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솔로는 강경하게 부인했다.

"나한테 수십 번 물었잖아. 유혹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도 지치지도 않고 몇 번이나 물어봤잖아, 자존심도 구기고. 다른 사람에겐 그러지 않는데. 나한테는 물렁해져서."

일리야의 표정이 부드러워진 대신 솔로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그렇게 표현할 것까지야."

"그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은데?"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일리야가 싱긋 웃었다.

"비겼다고 치자. 우리 둘 다 눈치가 없었다고 쳐."

솔로는 마지못해 말했다. 일리야는 솔로의 손을 펴고 그놈의 구깃구깃한 색종이 쪼가리를 쥐어주고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아들을 만큼 말해야지.

"나폴레옹 솔로, 우리 앞에서 폭탄이 터지면, 날 방패막이로 삼아서라도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솔로는 그 상황을 곰곰이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고는 비위가 뒤틀려서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 뭐 딱히 그렇게까지 해 가며 혼자 질기게 목숨 부지하고 싶은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걸."

일리야는 더욱 행복해했다.

"좋아, 그러면 살아도 나와 같이 살고 죽어도 나와 같이 죽자, 나폴레옹."

솔로는 손 안에 든 종잇조각을 바스락거렸다. 진짜 날로 먹으려는 쪽이 누구인지 모르겠네. 고백하면서 준다는 게 종이조각이라니!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 황금과 보석을 바쳤는지 모르겠지, 일리야 쿠리야킨. 솔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자네 마음은 잘 알겠고... 그럼 일단은."

솔로는 오늘 하려고 계획했던 제안을 일부 수정했다.

"크리스마스에 우리 함께 뤼테스에 가기로 약속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그러기 전에."

일리야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오늘 저녁에는 나와 함께 한 잔 하지 않겠나?"

오, 기꺼이. 솔로는 드디어 명확한 대답을 했고, 일리야는 다시 아름다워진 창 바깥의 가을 풍경에 한껏 만족하여, 솔로의 붉은 색종이 같은 입술에 두 번째로 입을 맞추었다.

솔로도 이번에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자꾸만 2년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사실 작년 일리야솔로 2주년 합작에 내려고 쓰다가 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쌍방눈새 쌍방짝사랑 풋풋한 일솔 쓰려고 하다가 합작에 내기엔 밋밋해서 버렸던 듯.

솔로는 맨날 하던 버릇이 그래서 다 뛰어넘고 은근하게 자자는 신호 보낼 줄밖에 모르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아닌가보다 멋대로 믿어버린 / 일리야는 데이트부터 시작해야 하는 고지식맨이라서 솔로의 앞단계 다 생략한 본론 의사 타진을 못 알아들은 뭐 그런 것으로... 이제 서로에게 맞춰서 근사한 레스토랑 데이트도 하고 섹스도 하면 되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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