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웨인의 잠은 대체로 안온한 휴식보다는 한계에 이를 만큼 혹사당한 정신과 육체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상태에 가깝다. 오래 묵은 번민이 그를 악몽 속 깊은 곳으로 침몰하게 하는 밤도, 자잘한 고민거리가 날카롭게 쿡쿡 찔러 깨우는 밤도 흔했다. 그리고 이날 새벽녘 브루스가 불편한 기분으로 눈을 뜬 것은 요동치는 주가도, 아슬아슬하게 놓쳐버린 범죄자도 아니라 저 메트로폴리스에서 아주 얌전하게 살고 있는 기자 한 명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그로부터 대략 열 시간 전 오후에 바쁜 일정 중 50분을 가까스로 빼내어 전용 헬리콥터 편으로 메트로폴리스의 웨인 파이낸스 빌딩에 다녀왔다. 크립토니안 침공 사태 이후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반짝거리는 88층짜리 새 빌딩의 가장 위층은 일반인에게 개방된 전망대와 까페가 차지하고 있고, 가끔 방문하는 웨인 회장의 집무실은 80층에 있었다. 원래부터 다른 층에 비해 사용하는 사람 수가 현저히 적었던 이 층의 회의실 중 하나가 최근 비밀리에 개조되었고 그곳에서 웨인 회장이 직접 지휘하는 중요한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된다고 알려져 있다.


 철저한 보안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 회의실 문에 설치된 홍채인식 잠금장치에 생체 정보가 입력된 사람을 열 손가락으로 꼽으면 손가락이 남아돌 정도였다. 게다가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 중 진짜 '사람' 숫자는 더 적었다. 아틀란티스인 혼혈 하나, 기계인간 하나, 아마존 전사 하나를 빼야 할 테니까.


 그리고 브루스가 굳이 일정에 없던 방문을 잡은 것은 그 방의 출입 권한을 가진 존재에 외계인 하나를 추가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쪽 눈으로 해야 돼요?"


 클락은 안과 검사용 의료기기 비슷하게 생긴 기계 앞에서 물었다. 아무 쪽이나 상관없어. 이 대답이 더 혼란스러웠는지 클락은 이쪽 저쪽으로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결국 왼쪽 눈을 렌즈에 댔다. 옆에 있는 모니터에는 파란 색에 갈색 얼룩이 있는 눈이 50배 크기로 확대되어 떠올랐고, 곧 레이저가 홍채의 독특한 무늬를 읽어들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기계가 비추는 빛 때문에 동공이 조그맣게 줄어들고 푸른 홍채가 넓어 보였지만, 브루스는 저 홍채가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띠처럼 남을 만큼 클락의 동공이 완전히 풀린 것도 본 적이 있었다. 원래는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었던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 슈퍼맨이 숨을 거두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 눈동자를 들여다 본 것이 브루스였으니까.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브루스가 이를 물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순간 벌써 스캔이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가벼운 기계음이 났다. 간단하군요, 하고 클락은 한 마디 했다. 모니터 속의 커다란 눈은 긴장이 풀린 듯 천천히 깜빡거렸다. 응.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브루스는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이것저것 취재중인 기자나, 전문적으로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빡빡한 일정을 다 기억하기도 어려운 대기업의 회장이나 일이 바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오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손님인 클락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걸 보고 나서 브루스도 곧장 옥상에 대기중인 헬리콥터로 고담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오늘 내로 정보가 시스템에 입력될 거야, 이후로는 너도 원할 때는 언제든지... '회의실'에 들어갈 수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클락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하며 브루스는 말했다. 클락은 '회의실' 이라는 말에 앞섰던 짧은 침묵을 놓치지 않고 빙긋 웃었다.


 "홀 오브 저스티스에 말이죠."


 브루스는 눈을 굴렸다.


 "첫째, 그건 홀이 아니라 그냥 방에 불과하고, 둘째, 너무 유치한 이름이야."


  그 거창한 이름을 제안한 사람은 어리고 쾌활한 배리 앨런이었다. 자고로 모임에는 멋진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요. 우리는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모였으니 저스티스 리그 어때요? 이 회의실을 홀 오브 저스티스라고 부릅시다!


 신이 나서 찬성한 것은 배리 또래인 빅터 스톤, 일명 사이보그 뿐이었고, 스물다섯 살을 넘은 지 한참 지난 나머지 구성원들은(30대 후반 하나, 40대 중반 하나, 3000하고도 몇 살 더 먹은 아마조니안 하나) 모두 험악한 표정과 무거운 침묵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 늙은 축들은 갓 결성된 신생 조직에 어울리는 다른 이름을 얼른 생각해 낼 열의도 없었기 때문에, 아직 저스티스 어쩌고 하는 명칭에 도전하는 경쟁작이 따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늦게 합류한 새 구성원에게 배리는 냉큼 그 이름을 소개했고, 클락은 그답게도 그런가 보다 해 버렸다.


 "그런데 어째서 모임 장소를 메트로폴리스로 정한 거죠? 고담의 웨인엔터프라이즈 본사로 했으면 바쁜 당신으로선 더 편했을 텐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을 멈춘 클락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본사에는 남는 방이 없어서."


 브루스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의 극히 일부일 뿐이지만.


 통칭 저스티스리그의 모임 장소를 메트로폴리스에 둔 것은, 이 회의실에 처음부터 주인 잃은 빈 의자가 하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의 결정이었다. 캔자스의 땅 속에 누운 채로도 슈퍼맨은 여러 모로 리그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어느 정도는 브루스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비록 죽어서 함께 할 수 없어도 슈퍼맨을 배제하고는 이 리그가 완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브루스는 모임 장소를 슈퍼맨의 도시로 정했으며, 리그의 구성원들 정보를 담아둔 폴더에는 언제나 슈퍼맨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더는 업데이트 될 일이 없는 자료일지라도. 암묵적인 멤버로서 그의 의자도 영원히 비워둘 셈이었다. 중요한 운동 선수의 번호가 영구결번으로 남듯이, 그 자리에 있어야 했을 사람을 떠올리게 하도록.


 하지만 그 자리가 다시 채워질 일이 생길 줄이야,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모든 가능성을 다 걱정하는 브루스 웨인으로서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버튼을 누르자 이 층에서 대기중이던 엘리베이터 문이 바로 열렸고, 클락은 브루스를 돌아보며 지나가듯이 물었다.


 "나도 배터랭 하나 가질 수 있을까요?"


 뭐라고. 한참 딴생각 중이었던 데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요청인지라 브루스는 잠에서 두들겨 깨워진 듯한 얼굴로 클락을 쳐다보았다. 클락은 벌써 엘리베이터로 들어가서 브루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뱉자마자 후회를 시작한 표정이었다. 후회에 관해서라면 브루스 웨인은 전문가였으므로, 그 기색을 잘못 볼 리는 없었다. 들은 말이 신기하고 보이는 표정이 놀라워서 브루스는 대답을 해 줘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클락의 얼굴을 빤히 마주보았다.


 "배터랭이 필요하다고?"


 마침내 되묻자, 클락은 양손을 들어올렸다. 마치 날아드는 주먹이라도 막으려는 것 같은 방어적인 동작이었다.


 "필요하다기보다는-"


 그러나 클락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망연한 눈으로 브루스를 보던 클락은 길어지는 침묵이 견디기 어려웠는지 아무 말이나 시작했다.


 "배, 배리가 배터랭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클락은 점점 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게요."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모습이 재미있어서 브루스는 아주 가끔 들이닥치는 장난기를 발휘했다. 눈썹을 찌푸리고 실적 나쁜 분기의 주주 총회에서처럼 엄격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일부러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던 것이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주는 게 아니야. 우선 위험한 물건이고, 손실분이 있을 때마다 알프레드가 고생한다고. 확실히 쓸 만한 곳이 있고 그게 나도 납득할 만한 일이라면 하나쯤 '빌려' 줄 수는 있겠지."


 싫으면 말라고 발끈해도 재미있었을 것이고, 평소엔 아무 데나 뿌리고 다니면서 괜히 비싸게 군다고 받아쳐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브루스가 상대하는 것은 클락 켄트였고, 그는 그저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쉽게 수긍했다.


 "그렇겠죠. 꼭 쓸 곳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어요."


 클락은 희미하게 미안해보이는 미소 비슷한 것을 짓더니 한 발 더 물러서서 그다지 크지 않은 엘리베이터의 안쪽 벽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했다.


 "다음에 봐요, 브루스."


 너무 깨끗한 포기에 브루스는 오히려 당황했다.


 "워워워, 잠깐만."


 우선 스르륵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발을 끼워넣어 막은 다음, 브루스는 급히 말했다.


 "농담이야, 배터랭은 소모품이야. 여분은 언제나 많지. 필요하면 하나 주지."


 "정말이에요?"


 클락의 얼굴이 잠깐 전구에 빛이 들어오듯 밝아졌으나, 그것은 지속적인 게 아니라 짧은 깜빡임이었다. 클락은 무언가-틀림없이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는 얼굴이 되더니 고개를 저었다.


 "음, 꼭 필요한 건 아니라서... 괜찮아요, 잊어버리세요. 고마워요, 브루스."


 딱히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고, 클락이 벌써 두 번째로 대화를 마무리하는 말을 던진 데다, 슬슬 어색해지기 시작해서 브루스는 얌전히 발을 뺐다. 잘 관리된 엘리베이터의 문은 스르륵 닫혔고, 방금 뭐였냐, 하고 생각하려니 엘리베이터는 벌써 20층쯤 아래로 내려가 버린 후였다.


 둘은 아직도 그만큼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차디찬 땅 아래에서 수 개월 만에 돌아온 클락 켄트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고 낯을 가렸으며 자기가 잠든 사이 여론이 반전된 것에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인류의 절반으로부터 미지의 적 취급 받던 것보다는 좋아요. 하지만 쏟아지던 의심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이렇게 칭송받는 것도 나한테는 과분한 것 같아요. 낯설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이런' 상태로는 더욱 그래요."


 클락은 펼친 양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손이 가벼운 찰과상과 베인 자국, 덴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자꾸 예전처럼 행동하려고 하니까요. 내가 얼마나 조심성 없이 살아왔는지 뼈저리게 느꼈어요. 냄비 뚜껑이나 빳빳한 새 종이가 위험한 물건이라는 생각, 전에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는데.


 "사람들은 슈퍼맨을 영웅이라 칭송하지만 지금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가 없어요."


 클락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세상 전체에 지고 있는 빚을 갚지 못하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세상 뿐 아니라 브루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클락 켄트는 살아 돌아온 첫 주에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수표를 보내 왔다. 브루스가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회사 직원의 순직에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여서 지급했던 유족 보상금이었다. 켄트 모자의 서명이 나란히 들어간 장문의 편지가 함께 왔다. 마사 켄트와 클락 켄트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클락 켄트가 코마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좋은 소식과 함께 지급 사유가 없어진 보상금을 기쁜 마음으로 돌려드린다는 내용이었다.


 예의바르고 틀린 말이 하나 없는 편지였지만 브루스는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클락 켄트는 마치 브루스 웨인에게 빚을 진 것처럼 굴었다. 브루스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고, 한 가닥의 호의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래서, 브루스는 클락이 아무런 마땅한 이유 없이 배터랭을 하나 가질 수 있겠느냐고 친구에게 하듯 물었을 때 내심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 때문에 그만 농담을 걸어버렸던 것일 테다. 그러나 클락은 그조차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감히 헛소리를 했다는 듯이 즉시 물러섰고 덕분에 브루스의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 인정머리 없는 꾸지람으로 남아버렸다.


 정말이지 요령이 없고 융통성이 없는 외계인이었다. 첫 만남이 안 좋았던 게 꼭 내 탓만은 아니라고. 매사 저렇게 뻣뻣이 구니까 애초에 오해를 했던 것 아니야. 조금은 모르는 척 넉살을 떨어도 좋을 텐데.


 이런 참으로 별 것 아닌 이유로, 브루스 웨인은 새벽에 잠을 설치기에 이른 것이었다. 모로 누운 채 시커먼 호수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는 더는 용납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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