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벌집을 쑤신 것처럼 분주하고 번잡스러운 데일리 플래닛의 사회부에 있으면서도, 클락 켄트는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데 꽤 신경을 썼다. 특히 퇴근하기 전에는 어제자 신문도, 종이 조각도, 구부러진 클립도, 펜이나 테이프도 굴러다니지 않도록 한 다음 기운차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자리를 뜨는 것이 버릇이다. 먼지 하나 없이 닦인 모니터 아래에 쏙 들어가 있는 키보드, 정갈하게 키를 맞춰 꽂혀 있는 파일, 딱 필요한 만큼만 틀림없이 연필꽂이에 꽂힌 펜, 그리고 액자에 끼워진 사진 두엇.


  그런데 클락이 평소보다 좀 더 이른 시간에 출근한 이날 아침에는 깨끗이 비어 있어야 할 책상 위에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잘 포장된 검은 상자에는 보낸 이의 이름도, 주소도 없었고, 상자를 묶어둔 붉은 리본에 미스터 켄트라는 이름이 적힌 꼬리표가 붙어 있을 뿐이었다. 최소한 누군가가 어젯밤 클락이 퇴근한 시점부터 이 날 아침 일곱 시 반 사이에 가져다 둔 것만은 분명했다.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아니었지만, 짐작 가는 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기절초풍할 만한 클락의 귀환을 맞이하여, 브루스 웨인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제정신을 차렸다. 아직 뇌세포가 반쯤 흐물흐물한 클락과, 울고 웃느라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는 로이스와 마사를 다독인 브루스는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여 (정보조작은 그가 배트맨으로서 보여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였지만 그는 이 쪽에도 전문가였다) 데일리 플래닛의 취재기자 클락 켄트가 둠스데이와 슈퍼맨 간의 난전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실종되어 코마 상태에 빠졌으며,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로 고담 변두리의 병원에 6개월이나 방치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밀어주었다.


  스몰빌의 무덤에 클락의 이름을 달고 묻힌 훼손이 심한 사체는 신원불명자의 것으로, 불행히도 클락과 혼동이 됐다는 것이었다. 물론 스몰빌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거짓말이었지만, 애초에 그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클락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데다가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아도 이미 알 건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해 둬서 나쁠 것은 없지. 서른 명 가량 되던 조문객들의 동향을 한동안 주도면밀하게 감시하면서, 브루스는 눈을 가늘게 뜬 클락에게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슈퍼맨이 희생되던 바로 그 날, 자기 역할을 다하느라 함께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었던 사람이 살아돌아왔다는 뉴스는 클락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덕분에 클락은  알고 지냈던 사람은 물론이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도 축하 선물을 많이 받았다. 카드, 편지, 풍선, 초콜릿, 꽃, 만년필이나 수첩, 온갖 잡다한 것들을. 클락은 그 중 크레파스로 삐뚤빼뚤 눌러 쓴 카드 하나를 집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


  <슈퍼맨도 아저씨처럼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클락은 줄곧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그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조금 헷갈린다. 한 번 죽기 전의 그의 몸이야말로 보통이니 정상이니 하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날 수 없고, 눈에서 고열의 광선을 뿜어낼 수도 없고, 옆방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그리고 이런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꿰뚫어 볼 수도 없는 지금 상태야말로 오히려 정상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겠지.


  어쨌든 축하 선물이 하나쯤 늦게 도착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클락은 짐작했다.


  상자를 예쁘게 둘러싼 리본을 잡아당기자 뚜껑은 수월하게 열렸고, 안에는 내용물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는 완충재가 들어 있었다. 그 속에서 금속으로 된 상자가 하나 더 나왔는데, 들어 보니 무게가 상당했다. 겉상자보다 훨씬 열기 힘들게 꽉 맞물린 뚜껑과 씨름하던 클락은 그만 손이 미끄러져 상자를 떨어뜨렸다. 상자는 도중에 열려 내용물을 뱉어내고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묵직하고 각이 많아서 멀리 굴러가지 않고 클락의 구두 바로 옆에 무겁게 떨어졌는데, 아주 익숙한 모양이었다. 두툼하게 조각된 박쥐 모양의 금속, 모든 모서리가 날카롭게 벼려진.


  배터랭이었다.


  그것도 한 다스나 되는 것이 차곡차곡 곱게 겹쳐져 철사로 묶여 있었다.


  깜짝 놀란 클락은 냉큼 바닥에 엎어져서 몸으로 다른 사람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날려 먹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것을 원래 있던 상자에 쓸어넣고 허둥지둥 뚜껑을 닫은 다음 황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른 시간의 데일리 플래닛에는 다행히도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고, 몇 안 되는 동료들은 각자 일에 바빠서 누구도 클락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본 사람 없겠지. 아니 이걸 이렇게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열어 볼 수 있는 곳에 올려놓다니 브루스답지 않게! 여러 모로 위험하잖아? 클락은 뒷목에 식은땀이 돋는 것을 느끼며-이것도 돌아온 후에 가끔 느끼는 낯선 현상이었다- 상자를 조심스럽게 안아든 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최초의 놀람이 가시자, 클락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배터랭 하나만 달라고 했던 것이 그렇게 마음이 쓰였을까, 하여튼 손이 크단 말이야. 괜한 부담을 준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클락도 짐작하고 있다. 브루스 웨인은 클락의 (다행히도 일시적이었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클락이 없는 동안, 웨인사의 총수로서, 고담의 수호자인 배트맨으로서, 그리고 전우로서 이루어진 브루스의 모든 행보에 클락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야 물론 브루스가 만든 크립토나이트 창이 없었으면 클락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브루스와 클락이 실체 없는 증오 때문에 서로를 닦아세우느라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았더라면 일이 그렇게 나빠지기 전에 렉스 루터의 속셈을 눈치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에 진정한 책임이 있는 것과, 그저 인과관계의 영원한 고리 중 하나를 만든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브루스가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과 같은 가차없는 기준에 따른다면, 아마 그 누구도 무고할 수 없을 것이다. 돌아온 후로 클락은 그가 개인적인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여러 방법으로 에둘러 표현하려고 했지만, 그 정도로 마음이 편해질 사람이었다면 아마 배트맨이 되지도 않았겠지.


  브루스 웨인은 스스로 자신의 어깨에 세상 전체를 짐 지운 사람이었다.


  클락조차도, 지구상에서 가장 강하고 하늘을 날 수 있고 눈에서는 수천 도의 열을 뿜어낼 수 있는 클락조차도 처음부터 세상 전체를 지킨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클락은 그저 할 수 있는 한,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고 손이 닿는 비극을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그의 타고난 특별함과 결합되자 규모가 다소 커진 것일 뿐이다.


  그러나 브루스 웨인은 별다른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이면서도 세상을 바꾸고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태어나기를 이곳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 난 클락이 이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만으로도 벅차 하는 동안, 브루스는 그런 제약이 없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고 자신이 속해 있던 이 세상과 사회를 지킬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이 때로는 눈앞에 보이는 사람의 목숨이나 시민적 권리를 박탈하는 수단을 통해서라도. 그 지점에서 클락은 브루스와 생각이 달랐지만, 아마 브루스는 클락이 없는 사이에 방법을 조금 바꾼 것 같았다. 더는 범죄자의 몸에 낙인을 찍지도 않았고, 살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 동안 브루스는 무엇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조직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모양이었고, 그 성과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클락은 아주 오래도록, 삼십 년이 조금 넘는 일생에 걸쳐 헤맸지만 조드 장군이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는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그 시기의 클락은 이따금 이 지구 위에 어쩌면 '자신과 같은' 존재가 더 없을지도 모른다는, 정말 혼자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치곤 했었다.


  그러나 브루스 웨인은 불과 반 년 만에 특별한 사람들을 벌써 여럿 모아들였고, 반갑고 놀라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클락에게 우쭐한 기색이 전혀 없이 건조한 태도로 사실을 말했다. 내 수단은 막대한 돈과 거리낌없는 탈법이지. 너는 터득 못할 요령이야.


  어쨌거나, 비록 모아들이는 과정상 크고 작은 위법행위가 좀 있었다고 해도, 이 연합에 클락은 전에 없이 즉각적인 소속감을 느꼈다.


  "그렇잖아도 너를 위해서라고 하더군."


  일곱 바다의 아서 커리가 말했다.


  아서는 워낙 말을 붙이기 쉬운 타입이 아니었다. 항상 무언가 잘못된 일이 있고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듯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글쎄, 브루스도 처음에는 그랬었다. 그런 단단한 태도가 반드시 무자비와 불관용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배트맨 덕에 스몰빌에 건강하게 살아 있는 마사 켄트야말로 그 증거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설명을 요구하는 클락에게 아서는 말했다.


  "인터뷰라도 하려는 건가, 기자답게?"


  "절대 발행할 수 없을 인터뷰지만."


  "처음에 나는 그를 믿지 않았거든. 다름아닌 배트맨이 '우리 같은 자들'을 모으다니. 그가 '우리 같은 자'의 존재를 알게 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너야말로 가장 잘 알 텐데."


  클락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지만, 물론 잘 알았다. 슈퍼맨이야말로 최초로 세상에 드러난, 브루스 웨인이 처음으로 알게 된 메타 휴먼이다. 그리고 브루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슈퍼맨을 죽여 없앨 무기를 만들었다. 게다가 효과도 확실했지, 고통을 기억하는 클락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 또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 마음만 먹으면 무서운 일을 할 수 있어."


  펼쳐진 두 개의 손가락을 아서가 클락의 눈 앞에서 천천히 흔들었다.


  "이 두 가지면 그에게 살의를 품게 만드는 데 충분했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웨인을 믿을 수 있었겠나. 아틀란티스인에게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크립토나이트'가 있을지 모르지.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웨인이야말로 그것을 가지고 있을 사람이야."


  "당신이 브루스를 높이 평가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쁘게 평가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둘 다야."


  아서는 즉시 대답했지만, 그의 수염에 가려진 입가가 얼핏 위로 올라가는 건 슈퍼 시력이 없어도 볼 수 있었다.


  "웨인은 바로 그런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다시 너와 같은 희생을 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알아야 한다고 하더군. 그래야만 진짜 적을 구별할 수 있고, 네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네가 목숨 바쳐 지킨 세상과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클락은 조금 감동했다.


  "그래서 그 때 브루스에게 설득되었어요?"


  "아니."


  살짝 심술궂은 즐거움이 비치는 입매로 아서는 말을 이었다.


  "조금 가엾다는 생각은 했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집착하고 있다고. 아마 그의 인생은 그런 것들로 가득했겠지, 잃어버려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만회하려는 허망한 노력들로. 하지만 모두가 아다시피 나는 다정한 성격이 못 되기 때문에-"


  아서는 흉터가 남은 눈썹을 까닥였다.


  "이미 죽은 자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땅 밑에 누운 자는 그것을 알아 주지도, 기뻐해 주지도 않을 거라고."


  너무한 말이네요, 하고 클락은 항의했다. 그 역시 이미 돌아가신 두 세계의 아버지를 위해 몇 번의 힘든 싸움을 겪었기 때문에. 딱히 논쟁을 할 생각은 없는 듯, 아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잔에 담긴 호박색 술을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나는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기독교의 신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영역보다 훨씬 넓은 일곱 바다를 속속들이 알아도 죽은 자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지. 네가 일어나기 전에는."


  아서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부활 같은 굉장한 일을 포함한 클락의 기이한 능력을 두려워하지도 경배하지도 경계하지도 않았다. 클락의 능력에 대해 말할 때의 아서는 마치-


  "덕분에 웨인이 맞고 내가 틀렸어. 나는 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지만 이번에는, 이번만은 패배치고 나쁘지 않았지."


  그는 마치 클락이 신통하고 기특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서와 브루스를 포함해, 이 대단한 사람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클락을 저스티스리그의 일원으로 맞아 주었지만, 그러나 이름에 걸맞은 활약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자꾸 클락을 움츠러들게 했다. 강력한 힘도 강철 같은 신체도 없는 클락 켄트는 저스티스리그는커녕 동네 축구회에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명실공히 리그의 일원이 되려면 그는 다시 하늘을 날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 지, 그런 날이 오기는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클락은 평생 어딘가에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지만, 이번만큼 간절한 동시에 이번만큼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느껴지는 일도 드물었다.


  "언제 저스티스리그의 일원이라는 확신이 생겼어?"


  클락의 질문에 배리 앨런은 어깨를 으쓱하며 방 한 켠에 곱게 보관된 배터랭을 가리켰다.


  "브루스가 나한테 저걸 집어던졌을 때요."


  배터랭은 온통 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그의 비밀 아지트에서도 가장 빛나는 장소에 전시되어 있었다. 정말 멋있죠! 저걸 보는 순간 나는 뭐가 됐든 그 비밀 결사의 회원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알았어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초청장이었죠. 브루스가 나를 믿고, 기꺼이 자기 정체를 알려주고, 그리고 나를 동료로 인정해 준 거잖아요. 어떻게 싫다고 말해요? 초청장치고 좀 살벌하긴 하지만, 그것도 브루스답죠.


  그래서 충동적으로 클락은 물었다. "나도 배터랭 하나 가질 수 있을까요?" 지금은 아무런 힘이 없지만, 남은 것은 예전의 이름뿐이지만. 그래도 클락은 온갖 기상천외한 사람들이 모인 저스티스리그의 일원이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브루스에게 그런 요청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할 엄두가 안 난 클락은 그만 용기가 꺾였다. 주제넘은 소리를 괜히 해 버렸다고 생각한 클락은 얼른 말을 주워담고는 그 요청을 금세 잊었다.


  하지만 배트맨은 잊는 법이 없다.






율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