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쿠리야킨은 내내 여러 동물에 비유당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 중 어느 별명도 자기 입으로 순순히 인정하는 일은 없겠지만.

 아주 오래 전에는 '토끼' 라고 다정하게 불릴 때마다 짐짓 질색하는 시늉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일리야의 인생에서 사라지고, 어머니가 너무 지쳐 버려 더 이상 달콤한 말을 입에 담을 여력이 없어질 때까지. 그 후에는 소위 '선생'과 '친구들'이 부르는 '말라빠진 들개새끼' 같은 멸칭이 '토끼'의 자리를 대신했다. 시간이 더 흘러 그렇게 부르는 놈들의 뼈를 맨손으로 부러뜨릴 수 있게 된 다음부터는, 일리야는 주로 '곰'이었다.

 이제 임무에 집중할 때의 일리야는 오로지 사냥감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사냥개 같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칭찬인지 조소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그 평가에 어울리게, 일리야는 왜인지 솔로가 제대로 손도 못 대던 고문실 문을 거침없이 밀어젖혔다. 솔로가 고문실에 남겨두고 온 재킷은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얌전히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다. 일리야는 최단시간 내에 그 값비싸고 세심하게 만들어졌지만 별볼일은 없는 목표물을 손에 넣은 후, 곧장 훨씬 더 중요한 다음 임무를 향해 자리를 뜰 작정이었다. 잡아야 할 나치 잔당이 있고, 손에 넣어야 할 정보가 있다. 한눈 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삼각대 위에 올라앉아 제 주인의 화형식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를 발견할 때까지만 해도.

 '벨젠의 도살자' '묵시록의 다섯번째 기수' 온갖 거창한 별명으로 불렸다던 엉클 루디는 다름아닌 롤라이플렉스 트윈 렌즈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을 자기 사형 집행인에게 유품으로 남겨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휘둥그렇게 뜬 두 개의 렌즈를 보면서 일리야는 이게 어떤 사악한 종류의 농담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옛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도둑맞는다고 여겼다고 한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그 이야기에 매혹되어, 일리야는 사진에 정교하게 재현된 자신의 얼굴, 사랑하는 부모님의 얼굴, 이미 돌아가신 조부모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영혼을 도둑맞는다는 이야기를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찍힌 그 순간이 붙잡혀 남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사진 속에서 일리야에게 영원한 미소를 보냈다.

 당시의 니콜라이 쿠리야킨은 사진에 관심을 보이는 열한 살짜리 아들에게 카메라를 선물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 트윈 렌즈 카메라, 아름다운 모양의 롤라이플렉스였다. 그가 그런 물건을 사들일 수 있었던 마지막 여름의 일이다.

 일리야가 제일 처음 찍은 피사체는 키우던 강아지였다. 첫 필름의 사진 열두 장 모두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한 데다가, 생기발랄하게 움직이는 강아지가 프레임 밖으로 살짝 벗어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 중 제일 잘 찍은 것을 골라 커피 테이블 위에 잘 보이도록 한동안 올려놓았었다.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겨우 반 년 남짓 애지중지 아껴가며 쓴 롤라이플렉스를 당국에 압수당한 후로, 일리야는 다시는 개인적인 사진을 찍지 않았으며 그렇다는 사실을 특별히 자각한 적도 없었다. 이후 일리야가 가졌던 카메라들은 모두 첩보전에 필요할 법한 첨단 기술이 적용된 카메라였고, 국가 재산이었으며, 일리야는 그것들을 철저히 지급받은 목적에 맞게 임무를 위해서만 사용했다.

 그러나 엉클 루디의 카메라를 보는 순간 일리야는 롤라이플렉스의 셔터를 누르는 감각, 특유의 커다란 스크린에 비친 세상, 찍고 싶은 대상을 고를 때의 두근거림을 고스란히 기억해냈다.

 잠깐 고민한 끝에 그는 결국 나폴레옹 솔로나 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순전히 개인적인 욕심으로 카메라를 집어 겨드랑이에 꼈던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두면 불에 탈 거야. 일리야는 마음대로 합리화하면서 역한 냄새가 나고 연기가 차오르기 시작하는 고문실 밖으로 나왔다.

 나폴레옹 솔로는 문 옆의 차가운 벽에 기대 서서 답지 않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냉기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약간 젖혀 뒤통수가 벽에 닿게 한 채로. 그 짧은 사이에 여유 있는 태도도 돌아왔고 호흡도 안정된 상태였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재킷을 내놓으라고 손을 척 내밀 때는 슬쩍 눈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재킷이 익어 버리기 전에 찾아냈군, 페릴?"

 솔로의 목소리는 유쾌했지만 일리야는 그것이 돌려 말한 치하인지 탓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짙푸른 색 재킷은 멀쩡했지만 그것을 향해 내민 솔로의 손, 한동안 전극에 물려 있었던 손가락 끝은 군데군데 발긋하게 '익어서' 부풀어 있었으니까.

 되찾은 재킷을 팔에 걸친 솔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걸음으로 앞장섰다. 등은 곧고 걸음은 느긋하다. 일리야와 솔로는 임무에 임하는 태도도 정반대였다. 일리야가 앞만 보고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솔로는 가능한 한 주위의 모든 것을 눈과 귀에 담으려 했다. 방만하고 무심해 보여도 사실은 꼼꼼한 관찰자다.

 그런 솔로가, 일리야가 끼고 나온 카메라를 미처 보지 못했다.

 솔로는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것만큼, 혹은 일리야에게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만큼 평온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리야는 솔로가 덴 자국이 살짝 남은 손가락으로 운전을 하겠다고 했을 때 토 달지 않고 그저 그러라고 했다. 아마 솔로는 어느 때보다도 더, 어디로 어떤 속도로 갈 지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행히 솔로는 임무에 지장이 없을 만큼 빠르게 자기 신체와 자기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성공적으로 회복했다. 그들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빈치구에라 섬을 습격하고, 개비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고, 각자의 모국을 배신하고, 새 코드네임과 새 상관을 얻게 되는 내내 루디의 카메라는 일리야가 빌려 왔던 트럭 조수석 발치에 방치되어 있었다.

 마침내 일리야가 그 카메라를 천천히 살펴볼 여유를 얻은 것은 이스탄불의 작은 호텔에서였다. 다음 날 아침까지는 온전하게 시간이 있었고, 오랜만에 혼자 방을 쓰게 된 일리야는 일찍 잠자리에 드는 대신 안에 든 필름을 인화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울고 불고 겁에 질린 솔로가 찍혔을지도 모르지. 그걸 쥐고 있으면 앞으로 솔로는 턱을 치켜들고 사람을 낮추어 보는 얼굴을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일리야 앞에서는.

 일리야는 붉은 조명 아래서 인화지 위로 천천히 떠오르는 형상을 찌푸린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첫번째 사진은 무난했다. 솔로는 그 흉한 의자 위이기는 했지만 아직 묶이지도 않았고 손가락에 전극을 붙이고 있지도 않았다. 사진을 찍히는 줄도,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그는 그냥 자는 중이었다. 표정은 이완되어 있고 입술은 살짝 벌어졌다. 언제나 보던 밉살스러운 미소도,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오만한 태도도 없이.

 다음 사진의 솔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지만 이미 준비는 끝난 후다. 재킷은 벗겨져 사라졌고, 그의 목숨을 구하는 데 한 몫을 하게 될 추적장치가 달린 구두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손목과 발목, 팔뚝, 허리, 머리가 모두 흉악한 가죽띠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양손에는 우스꽝스러워보이는 전극을 잔뜩 매달고 있었다.

 세번째 사진의 솔로는 윤곽이 약간 흐렸다. 초점은 정확하게 맞았지만 솔로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경련이었을 것이다. 꽉 감긴 눈가에는 온통 고통 때문에 주름이 잡혔다. 턱은 팽팽하게 긴장했고 이는 부서질 듯이 악물고 있었다. 사진에 손을 대면 약한 전류가 느껴질 것만 같았다.

 일리야는 끔찍한 광경에 익숙했다. 그는 충분히 많은 것을 보았고, 그 중 일부는 직접 가담하기도 직접 겪어보기도 했다. 이제 와서 이 정도 고통, 그것도 이미 지난 일이 된 사진 속의 고통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는건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솔로는 잘 버텨냈다. 그 순간을 무사히 넘기고 회복해 임무를 완수한 후 지금은 아마 아래층에서 멀쩡히 자고 있을 것이다. 별 일 아니었다.

 그래서 일리야는 계속했다.

 이번 것은 전류가 흐르는 중에 찍힌 사진은 아니었다. 어쩌면 수다 떨기 좋아하는 엉클 루디가 무언가 설교를 하던 중이었을 수도 있다.

 머리를 돌릴 수 없게 고정된 솔로는 곁눈으로 이 쪽을 보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었고, 꽉 깨물어 터진 입술과 한쪽 콧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외에 당장 이렇다할 상처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 눈.

 나폴레옹 솔로의 생각은 언제나 읽기 어려웠다. 철저하게 계산된 표정과 여유로운 몸짓으로 조심스레 감춰진 그의 진의는 까다로운 암호와 마찬가지였다. 일리야는 아직 그것을 풀 수 있을 정도로 솔로를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사진에서 솔로는 활짝 펼쳐진 책 같은 눈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크고 선명한 글씨로 소리치듯 적혀 있는 것은 체념이다. 일리야는 그런 눈을 알고 있었다. 아주 잘 알았다.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란 전혀 없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혼자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눈이었다. 그리고 솔로만큼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온 그 정도로 철저한 깨달음은 대개의 경우 틀림없이 들어맞게 마련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자네를 다시 보게 되어 정말 기뻐."

 솔로는 그렇게 말했었다. 지친 것 같긴 했어도 평소 하던 식의 농담조였다. 이제 와서야 비로소 일리야는 그 말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았다. 언제나 인생에 놀랄 일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듯이 굴던 솔로에게, 그 순간의 일리야는 감히 기대도 하지 못했던 즐거운 의외였다.

 일리야는 사진 속 솔로의 눈을 손가락 끝으로 가렸다.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눈이었다. 애초부터 보지 않는 것이 좋았을 눈이었다. 충동을 다스리지 못하고 카메라를 가져온 것이 문제였다. 그냥 버릴 수도 있었던 필름을 굳이 인화하려 한 것이 문제였다. 개비 텔러가 알렉산더 빈치구에라에게 일리야와 솔로의 정체를 밝혀버린 것도 문제였고, 그 순간에 솔로가 빅토리아 빈치구에라의 수중에 있었다는 점도 문제였고, 일리야의 추적장치가 만족할 만큼 정교하지 못해서 이 골칫거리 미국인 동료를 찾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는 점도 문제였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애초에 KGB가 CIA와 어울리지도 않는 연합을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손을 떨게 된다. 다들 일리야의 방아쇠를 분노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문제는 무력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때,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할 때, 또는 무슨 수를 써도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을 떠올릴 때 닥쳐오는 무력감.

 손가락이 저절로 말려들어가 쥐고 있던 사진을 온통 구겨놓았다. 처음으로 엉클 루디의 죽음이 유감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에게 제대로 대가를 치르게 했어야 했다. 일종의 사고로 어리둥절하게 끝을 맺도록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무엇 때문에, 무슨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지 뼈에 새겨지도록 확실히 알려주었어야 했다.

 일리야는 이미 구겨진 사진을 반으로 잡아 찢었다. 이어서, 인화된 것들은 물론이고 아직 인화액 속에 잠긴 것도 모두 꺼내 쳐다보지도 않고 가차없이 찢어 필름과 함께 남김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쓰레기통을 발코니로 안고 나가 안에 든 것들에 불을 붙였다. 쥐고 있는 성냥갑이 자꾸 흔들려서 성냥을 몇 개 부러뜨려 가며 대여섯 번이나 그어야 했다. 모든 것이 한데 뭉쳐 타들어가는 동안 일리야는 손가락으로 차가운 난간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또 아무 잘못 없는 호텔방을 박살내서 잠든 사람들을 깨우기 싫거든,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은 제쳐 두고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매캐한 탄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필름과 사진이 오그라들어 알아볼 수 없는 형상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일리야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루디를 되살려내 멱살을 잡을 수는 없다. 솔로가 당한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다. 대신-.

 날이 밝자마자 롤라이플렉스에 넣을 새 필름을 구해야겠다.

 일리야는 아주 오랜만에 목적도 없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사진을 찍기로 마음먹었다. 국가의 안보도, 어느 독재자의 권좌도, 막대한 검은 돈도, 누군가의 목숨도 걸려 있지 않은 사진을.

 그랜드 바자르의 인파 속에서 시답잖은 물건들을 쑤석거리는 솔로를 찍을 것이다. 썬글라스를 치켜올리고 아야 소피아의 첨탑을 올려다보는 개비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 미소짓는 솔로와 개비를 찍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훔쳐내어 오래도록 남겨둘 순간은 바로 그런 것들이어야 한다고, 일리야는 결정했다.

 그러자 사그라드는 불꽃과 함께 떨림도 서서히 멎어 갔다.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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