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폴레옹 솔로는 양 손을 허리에 얹고 입에 작은 손전등을 문 채 고개를 갸웃 눕혔다. 손전등의 미약한 빛은 벽을 가득 채우고 늘어선 금고들을 한 눈에 비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오늘 나폴레옹이 열려는 금고는 단 하나뿐이니까 상관 없었다.

  나폴레옹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몸 전체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가득 차는 걸 느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임무가 아닌 개인적인 호기심을 위해 겹겹이 잠긴 은행을 뚫고 들어온지라 그야말로 살 맛이 났다.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의 냄새! 상부가 시켜서 하는 도둑질은 재미가 덜하지. 아무도 시키지 않은, 모두가 반대하는 일이야말로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도둑질 아니겠나.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섬세한 금고털이 도구들을 애정어린 손짓으로 한 번 쓰다듬은 그는 적당한 것을 골라 1193번 금고 앞에 섰다. 여기까지 오는 데 대략 석 달 가까이 걸렸다. 일리야 쿠리야킨이 정체불명의 열쇠를 자기 아버지의 시계만큼이나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아챈 때로부터.

  오해는 마시길. 나폴레옹도 처음에는 충동을 억누르고 신사적으로 접근했다. 일리야는 이제 그의 동료니까, 다짜고짜 속이고 훔치고 털기에 앞서서 그 열쇠는 뭐냐고 정중히 물어보는 게 순서이다. 그리고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폴레옹은 자신이 대체로 상식적인 편이라고 자부했다. 규칙을 어기고 남을 조종하는 건 꽤 재미도 있는데다 나폴레옹이 특별히 잘 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해결이 어려울 때의 차선책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점잖고도 평범한 질문에 일리야는 쓸데없이 목덜미 털을 올올이 곤두세우며 신경 끄라는 의사를 살벌하게 전달해 왔다. 그 때까지 일리야의 열쇠에 대한 나폴레옹의 호기심이 오늘 직원 식당 점심 메뉴가 무엇일까 수준의 가벼운 것이었다면, 일리야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바로 그 순간 어떤 엄중한 법으로도, 삼엄한 금고로도 막을 수 없는 수준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나폴레옹은 일리야에게 백 번 물어봤자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물론 궁금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제 예의상의 절차는 거쳤다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스스로 답을 알아내기 위한 다음 계획에 착수했던 것이다.

  일리야의 열쇠가 엉클의 헤드쿼터에서 멀지 않은 은행 지점의 개인 대여금고 열쇠임을 알아내는 건 금방이었다. 하지만 은행 직원을 꼬드기고 은행 기록을 털어서 일리야가 빌린 금고 번호를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리고 임무 사이의 한가한 시기, 딱 맞는 거사 날짜를 고르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택한 바로 오늘. 날씨는 쾌청했으며, 그믐달이 떠서 어두웠고, 몸 상태는 최상이다. 손에 딱 맞는데다 세심하게 닦고 기름칠 해 둔 금고털이 장비들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잘 돌아갔다. 힘과 기술, 대범함과 신중함의 신묘한 조화로, 나폴레옹은 착착 일을 진행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은행측이 보관하는 열쇠로 열었겠지만 오늘은 나폴레옹의 사랑스런 도구들이 열어준 금고 안에는, 고객이 가진 열쇠로만 열리는 상자가 들어 있다. 하지만 이 상자는 굳이 억지로 딸 필요가 없었다. 아까 초저녁에 일리야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슬쩍해 왔으니까. 경쾌한 손놀림으로 열쇠구멍에 집어넣은 열쇠를 비틀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나폴레옹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단 한 가지였고, 나폴레옹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어찌나 의아했던지, 흐음, 하고 나폴레옹은 은행에 숨어든 이래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상자 구석에 처박힌 건 다름 아닌 봉제 인형이다. 대충 만든 이목구비에 비해 입고 있는 옷은 제법 잘 지어진 정장이었다. 그 옷이 어째 낯이 익어서 나폴레옹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인형 옷을 만드는 데 쓴 옷감은 옅은 푸른색에 정교한 체크 무늬가 들어간 고급이다.

  몇 달 전 작전 중에 잃어버린 내 재킷과 같은 감이잖아!

  인형의 눈 위치에는 자그마한 파란 구슬이 두 개, 마치 비둘기 눈처럼 반들반들 동그랗게 박혀 나폴레옹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붉은 실로 대충 수놓은 오만하고 삐뚜름한 미소.

  부두 인형이야?

  게다가, 이건 틀림없이 나잖아?





2.

  크크크, 오로고타는 정말로 글자로 쓴 듯이 크크크 하고 웃는 남자였다. 햇빛을 자주 보지 않아 칙칙한 낯색에 푹 패인 볼, 말라붙은 육포같이 생긴 얼굴은 솔직히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생김새다.

  근방 여섯 개 나라를 통틀어 가장 악랄하고도 엉뚱한 범죄조직의 수장이자 과대망상증 환자, 사이비 종교 교주인 이 놈을 드디어 붙잡은 것이다. 작전을 완전히 성공시킨 일리야로서는 유쾌하지 않을 이유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웃고 있는 것은 일리야가 아닌 오로고타였다.

  마치 "붙잡힌 주제에, 뭐가 우습나?" 하고 물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은 기색이어서, 일리야는 일부러 더욱 굳게 침묵했다. 일리야는 가끔 좀 심술궂어질 때가 있는데 직간접적으로 수백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를 눈앞에 두었을 때가 특히 그렇다. 그래서 오로고타는 차가운 일리야의 시선 아래에서 한참 크크거리다가 결국 지쳐버려서 자기가 먼저 용건을 꺼냈다. 영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다.

  "그 놈은 어딨나? 매일 붙어다니던 교활한 여우놈 말이야."

  일리야는 여전히 어떤 말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오로고타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정말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일리야는 그 교활한 여우놈이 (누구를 가리키는 표현인지 뻔했다) 지금 오로고타의 거대한 금고를 신나게 따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금고 안에 든 각국 기밀 정보는 물론 값나가는 금붙이나 보석도 몇 개 주머니에 집어 넣겠지. 정보야 웨이벌리에게 보내겠지만 보석은 흔적도 없이 꿀꺽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알 게 뭐야.

  "저기? 러시아인? 듣고 있나? 네 동료 말이야. 나폴레옹 솔로. 관심 없어?"
  "응. 없어."

  오로고타는 점점 더 미심쩍어하는 얼굴이 되었다. 꾸며냈던 의기양양한 웃음이 점차 사라지더니, 그르렁거리며 놈은 물었다.

  "...솔로 그 놈 살아 있어?"
  "무슨 소리야?"
  "나폴레옹 솔로가 혹시 오늘 아침쯤 코피를 흘리며 죽어넘어지거나 하지 않았냐는 말이다."

  이 미친 자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한 채로 일리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을 본 오로고타는 일리야가 이 방 문을 발로 걷어차 박살내고 들어올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죽지 않았단 말인가! 분명히 제대로 걸었는데!"
  "뭘 걸어?"

  때 맞춰, 벌써 신속하게 자기가 맡은 임무를 해치운 나폴레옹 솔로가 떨어져나간 문짝을 넘어 등장했다. 언제나처럼 말끔하고 잘생긴 얼굴이었고,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평소보다 더 팔팔해 보이는 게 과연 최대최고의 취미 생활인 금고따기를 방금 마친 모양이다.

  "안녕하신가, 위대하신 주술사 양반. 그 뛰어난 영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이 치욕은 전혀 예견하지 못하셨나 보지?"

  나폴레옹이 특유의 예의바르고도 사람 성질을 박박 긁는 방식으로 인사를 던지자 오로고타는 기함했다.

  "정말 살아 있다니! 이렇게 멀쩡하게...... 지독한 놈."

  난데없이 욕을 얻어먹은 나폴레옹은 어리둥절했다.

  "난 딱히 죽어 있을 만한 짓을 당한 적이 없는데? 적어도 최근에는."

  오로고타는 팔팔 뛰었다. 꽁꽁 묶여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상태를 감안할 때 그보다 더 격렬할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분명 가장 강력한 죽음의 주술을 걸었어! 그 주술에 걸리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지금쯤이면 네놈의 뇌는 곤죽이 되었어야 해!"

  나폴레옹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어쩐지 요 며칠 머리가 좀 아프더라니. 어쨌든 난 워낙 기가 세고 타고난 운이 좋아서 저주니 뭐니 그런 거 잘 안 통해요, 주술사 양반."

  코끝으로 웃어넘긴 나폴레옹은 바닥에 널브러진 오로고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가실까요?"

  국제 첩보기관에 생포당했다는 사실보다도 최고의 주술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더 낙심한 오로고타를 앞세워 나폴레옹이 나가버린 후, 일리야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주라니.

  물론 일리야도 저주 따위는 믿지 않는다. 이성적인 인민이라면 미신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지. 하지만 저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은 하니까. 일리야는 어디를 뒤지면 좋을까, 하고 방 안을 휙 둘러보았다.





3.

  집으로 돌아온 나폴레옹 솔로는 인형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 보는 중이었다. KGB의 촉망받는 요원이었고, 지금은 엉클의 핵심 요원이자 나폴레옹의 파트너인 일리야 쿠리야킨이 다름아닌 부두 인형을 은행 대여 금고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나를 싫어하는 줄이야 알았지만 이 정도였다니. 그야 둘은 인사를 하기도 전에 교살부터 시도했던 사이니까 처음부터 원만한 관계였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빈치구에라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지 벌써 반 년 가까이 지났고 그 동안 일리야도 나폴레옹도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적어도 나폴레옹은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밝은 불빛 아래서 찬찬히 살펴보면 볼수록 인형은 틀림없이 나폴레옹 솔로를 본따 만든 것이었다. 인형이 입은 옷은 몇 달 전 오로고타 사건에 열중하고 있을 때 나폴레옹이 잃어버렸던 바로 그 옷조각으로 만들었다. 오로고타 그 놈은 정말 적의 옷을 수고롭게 훔쳐내어 부두 인형 따위를 만들 만큼 미친 놈이었다. 저주를 걸었다고 했는데 그 때 사용한 게 아마도 이 인형인 모양이지. 그리고 어느 틈에 일리야가 이 인형을 발견했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일리야는 나폴레옹과 다르다. 임무 중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개인적인 이유로 빼돌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인형만은 예외적으로 챙겨 놓았다가 조심스럽게 개인 대여 금고까지 빌려서 넣어 두다니. 이걸로 무얼 할 셈이었지. 동료라 차마 죽일 수는 없지만 대신 인형에 대고 화풀이라도 할 참이었단 말인가? 나폴레옹이 원인 모를 두통으로 끙끙대거나, 건너려는 신호등마다 코앞에서 붉은 색으로 바뀌고,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테이블 다리에 새끼 발가락을 부딪치기를 바라면서?

  나폴레옹은 인형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다가 인형의 관자놀이께에 굵은 바늘로 몇 번이나 찌른 자국이 남은 걸 보았다. 입맛이 써서, 나폴레옹은 인형을 내려놓고 와인렉으로 갔다. 뭔가 향긋한 걸로 입안을 씻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4.

  그래서 얼마 후, 금고 열쇠를 도둑맞은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일리야 쿠리야킨이 유력한 용의자 나폴레옹의 집 문짝을 발로 걷어차고 난입했을 때, 나폴레옹은 한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무릎 위에는 부두 인형을 올려놓은 채였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리야를 쳐다보더니 와인병을 들어올려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이 마셨나, 왜 문간에 곰이 보이지."

  일리야는 턱짓으로 나폴레옹의 무릎 위에 얹힌 인형을 가리키며 씩씩 추궁했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나? 그렇다고 내 열쇠를 훔쳐내고, 은행을 털어?"
  "걱정 마. 단서라곤 아무것도 안 남겼어. 얼마나 깔끔하게 정돈했는데? 은행은 도둑맞은 줄도 모를 걸."

  나폴레옹은 허세를 떨더니 무릎에 던져두었던 인형을 들어올려 보란듯이 흔들었다.

  "그나저나 이런 깜찍한 짓이나 하고 있었다니, 일리야 쿠리야킨."

  읍. 일리야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사이, 나폴레옹은 흥 하더니 일리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부엌으로 갔다.

  일리야는 그가 뭘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짐작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바싹 따라갔고, 그래서 나폴레옹이 가스렌지 불을 켜고 거기에 인형을 집어던지기 직전에 성공적으로 인형을 빼앗을 수가 있었다.

  "뭐 하는 건데!"
  "태우려는데. 기분 나쁘잖아? 저런 걸 믿는 건 아니지만."
  "태우면 안 돼!"

  일리야는 숨을 몰아쉬었다.

  "왜 안 돼!"

  나폴레옹은 마주 소리쳤다. 그가 어떤 이유로든 언성을 높이는 건 처음 봤기 때문에 일리야는 움찔했다.

  "저주를 하고 싶을 정도로 음침하게 날 미워하고 있을 줄이야."

  한숨을 푹 내쉰 나폴레옹은 고개를 모로 돌리고 눈썹을 한껏 늘어뜨린 채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연기했다.

  "난 자네를 믿었는데."

  죄책감을 가중시켜 보려는 속셈으로 과장된 실망의 표정을 지으며 아무렇게나 내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을 뱉은 순간 나폴레옹은 스스로도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게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라는 걸, 입밖에 내는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믿었다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레드 페릴이 내 등 뒤에서 칼을... 아니 이 경우엔 바늘인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해를 끼치려 들 리 없다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말로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입맛이 썼던 모양이다.

  이런 낭패가. 나도 모르는 사이 페릴을 믿고 있었다니! 나폴레옹은 황급히 일리야에게서 돌아서서 찬장을 뒤졌다. 스카치! 와인으론 안 된다. 스카치 위스키가 필요하다. 스트레이트로!

  나폴레옹이 진심으로 맘이 상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일리야도 진심으로 당황했다.

  "아, 아냐. 그런 거 아니야. 그러려고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





5.

  정말로 그러려던 것이 아니었다.

  나폴레옹 솔로가 오로고타 검거 작전을 펼치는 내내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일리야가 오로고타의 방에서 찾아낸 저주 인형의 머리통을 굵직한 대바늘이 관통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두 사실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나폴레옹 솔로를 빼닮은 인형이 머리를 관통당한 모습은 썩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일리야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즉시 인형 머리에서 꼴보기 싫은 바늘을 뽑아냈고, 어쩔 줄 몰라하다가 바늘은 버리고 인형은 자기도 모르게 품에 넣고 나와버렸다.

  작전이 완전히 마무리된 후, 일리야는 인형을 붙들고 고민했다. 막연히 이런 물건은 태워 버리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나 생각이 들었고, 일리야는 정말 성냥을 그어 인형에 갖다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인형의 동그랗고 파란 구슬눈이 어쩐지 원망하는 것처럼 보여서 더 기분이 나빠진 나머지 일리야는 성냥을 얼른 껐다. 모르겠다, 꼭 당장 처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폴레옹 솔로는 손에 붕대를 휘감고 나타났던 것이다. 어젯밤에 차 좀 마시려고 물 끓이다가 엎었지 뭐야. 좀 데긴 했는데 별 건 아냐. 열성적으로 사고 경위를 묻는 일리야에게 나폴레옹은 대답했다. 그런데 페릴, 괜찮아? 왠지 얼굴이 좀 창백해 보이는데.

  분명 우연일 테지만, 그래도 일리야는 또다시 몰래 인형을 꺼내서 인형의 그을린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성냥불에 살짝 눌어붙은 부위가 나폴레옹이 화상을 입은 부위와 대략 비슷하다는 사실을 도저히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만약 지난 밤에 인형을 통째로 불태워 버렸으면 나폴레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이성은 당연히 별 일 없었을 거라고 외쳤지만, 그래도 왠지 오싹했다.

  일리야 쿠리야킨은 저주 따위 믿지 않았다. 결코, 조금도 그 따위 것을 믿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인형을 금고에다 넣어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란 말이다. 단지 인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인형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리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 인형을 버리거나 태웠다가 나한테 똑같이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금고에 넣어둔 거였단 말이야? 아무도 건드릴 수 없고, 불이 나도 안전한 곳에?"

  일리야는 신음했다. 나폴레옹 솔로는 복잡한 사태를 명료하게 축약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게 듣는 사람을 좀 불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말하니까 마치 내가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잖아."
  "아니야?"
  "다르다. 그것과는. 설명 어렵다. 난 미신 믿지 않는다. 딱히 네 걱정을 한 것도 아니다."

  일리야는 갑자기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한 러시안 액센트, 형편없는 영어로 중얼거리더니 휙 돌아섰다. 부지런히 문간을 향해 도망치면서 일리야는 계속 횡설수설했다.

  "네 인형이니까 네가 가지고 있든지.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함부로 버리거나 태우지는...... 아, 아니 난 모르겠고 나랑 상관도 없으니까 네 맘대로 해라."
  "일리야."

  나폴레옹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일리야의 이름을 불렀다.

  "몹시 기분 나빠지니까 그런 투로 내 이름 부르지 마라. 좋은 밤. 잘 자라."

  "일리야."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소맷부리를 가만히 잡았고, 일리야는 러시아어로 중얼중얼 욕을 하면서도 나폴레옹을 향해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답게도 상냥하고 조근조근한 태도로 말했다.

  "오해한 건 사과할게, 네가 그렇게 음험하게 누굴 미워할 리가 없지. 그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

  일리야는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늦게나마 깨달았다니 다행이군."

  나폴레옹은 부두 인형을 들어, 그것의 얼굴을 일리야의 코끝에 톡 갖다 댔다. 놀리듯이 가볍고 부드러운 접촉이었지만 일리야는 마치 콧잔등을 얻어맞기라도 한 듯 힘껏 어깨를 움찔했다. 화를 내야 할 지, 웃어야 할 지 몰라서 아주 표정이 이상해진 걸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럼 인형은 계속 너한테 맡겨 둘게."

  나폴레옹은 꼼짝도 못하고 굳은 일리야에게 인형을 흔쾌히 내밀었다.

  "이게 네 손에 있으면 나도 안심할 것 같아."

  나폴레옹이 일리야의 손 위에 곱게 얹어 놓은 부두 인형이 일리야에게 삐뚜름한 미소를 보냈다. 기묘하게 나폴레옹을 닮은 그 단순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일리야도 그만 어설프게 빙긋 웃고 말았다.



(201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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