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은 시작할 때 그랬듯, 끝날 때도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러웠다.

  후에 인류가 겪은 최초의 외계 침략일로 기록될 이날, 처음으로 아서의 주의를 끌어당긴 예사롭지 않은 현상은 인도양 어딘가에서 상당한 규모의 해양 생태계가 일순간에 사라진 일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소름끼치는 감각이었고, 일곱 대양을 손바닥처럼 익숙하게 여기는 아서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랜만에 바다에서 핵실험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엔 연안에서 지나치게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근방에는 핵을 보유한 나라도 없었다.

  아서는 당장 무슨 일인지 알아내려 시도했지만 근처로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막강한 압력으로 된 보이지 않는 벽이 물을 모조리 밀어내 바닷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땅을 바싹 말려버렸다. 이 기이한 사태를 해결하기는커녕 본래 그의 것이었던 영역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된 아서는 분노에 차서 있는 힘을 다 끌어올리고 있었다.

  덕분에 갑작스럽게 중력파가 사라졌을 때, 강제로 비워졌던 공간을 다시 채우려는 엄청난 양의 물과 더불어 아서는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하는 상태로 순식간에 재앙의 중심지를 향해 밀려갔다. 이 바다가 수십억년 동안이나 겪은 적 없었을 대대적인 규모의 혼란 속에서, 찢겨나간 온갖 파편들이 총알처럼 위협적인 에너지를 담고 엄청난 속도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서조차도 예외없이 무자비하게 거기에 말려들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런 물살과 파편들 속에서는 뼈만 남도록 발려나갔을 것이다.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없고, 정확히 어디쯤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바다에서는 처음 겪는 혼란스러운 감각이었다. 아서는 억지로 방향을 잡으려는 시도를 멈추고 몸을 물살에 맡기기로 했다. 바닷물은 정직하다. 문제가 일어난 곳까지 그를 기꺼이 데려다 줄 것이다.

  마침내 바다가 어느 정도 진정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날뛰던 물살이 견딜 만하게 잦아들었을 때, 아서는 균형을 회복하고 위를 향해 박차올라갔다. 비정상적인 높은 파도를 뚫고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자마자 낯설고 기이한 대기가 불쾌한 냄새를 풍겨 아서는 숨을 멈추었다. 불길하고 무거운 공기였고, 바닷속처럼 수면 위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근방의 바다가 밀려났을 뿐 아니라 공기도 그 성질을 바꾸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태어나 자란 그 어떤 생명도 맡아보지 못했을, 이 행성에는 존재한 적 없던 기체가 대기에 섞여들었다. 이 사태를 초래한 근원이 사라지면서 물이 돌아오고 냄새도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지만 당분간은 대기가 유독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서는 아주 오래 전 크립톤에서 만든 거대한 월드 엔진의 잔해를 처음으로 목격한 지각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일견 괴수 같지만 생명 없는 기계인 그것은 수백 층짜리 빌딩만한 크기였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구조물과도 닮지 않은 재질과 형태와 용도를 지닌 기계가 반으로 갈라지고 다리가 부러진 채 그 크기에 비해 얕은 물 속에 처박혀 있다. 보기에는 완전히 부서져 다시 위협적인 에너지를 내뿜을 것 같지 않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아서는 온통 할퀴어지고 휘저어진 충격이 그대로 남은 바다를 가로질러 월드 엔진에 접근했다.

  쪼개진 부위의 형태를 보면 구조적 결함이나 오작동 때문이 아니라 무엇인가 외부적 충격에 의한 파괴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엇이? 인간이 만든 무기 중에는 이 기계가 자아내던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압력을 감당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없다. 기계는 아직도 약하게 진동하고 있었지만 격렬하고 치명적이던 활동의 여진 같은 것일 뿐, 기계 자체의 동력은 완전히 죽었다.

  한숨 돌린 아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죽은 것 투성이로군, 원래 생명으로 가득했던 곳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 바다의 회복력은 위대하니 맡겨 두어도 될 것이다. 완전히 복구되기까지 시간은 좀 필요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근처의 물 속 어디선가 두근거리는 박동이 느껴졌다. 산 것의 꿈틀거림이다. 규칙적으로 수축했다가 이완하는 더운 심장의 소리였다. 용케 살아남은 어린 고래일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서는 확인하기 위해 해저로 내려갔다. 죽음이 가득한 바닷속 저 아래, 부서진 크립톤 기계의 육중한 파편들 사이에서 박동이 들렸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구조물에 짓눌린 채 바다 밑바닥에 처박힌 그것은 낯익은 존재이자 낯선 존재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익숙한 인간의 모양이지만 아서는 월드 엔진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경이감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물살에 휘말려 마치 바람에 날리듯 나부끼는 붉은 망토, 물고기 비늘이 연상될만큼 매끈하고 차가운 파란 색으로 몸을 꼭 맞게 감은 수트, 해초처럼 가볍게 너울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어두운 물 속에서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 아서는 숨을 들이켰다. 이 경우는 공기가 아니라 물이겠지만.

  -그는 너희들과 비슷하게 보이겠지만, 너희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아서는 어젯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머나먼 별의 바다를 건너 온 다른 세계의 장군이 보내온 메시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전포고를 보고 들었다. 우리 종족 중 하나가 너희들 중에 숨어 있다. 그의 신병을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어지는 것은 흔하고 잔인한 위협이었으나 절박한 기색 또한 느껴졌다.

  -이 행성의 운명이 그 자의 손에 달려 있다.

  그의 이름은 칼-엘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서는 이 얼굴을 안다. 생소한 이름과 낯익은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그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름, 얼굴, 아서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아주 작은 조각 몇 개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 그보다 이 존재의 비밀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 알래스카의 더치 하버로부터 200여 마일 떨어진 베링해의 물 속에서 아서는 수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흐린 날의 햇살을 가리며 중형 게잡이 어선의 밑바닥이 정신없이 요동치는 모습을.

  어선과 연결되었던 굵은 줄이 끊어져, 육중한 철골로 만들어진 대게잡이 케이지가 아슬아슬하게 아서의 곁을 스쳐지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갔다. 배 위에서 들리는 기척과 소리에 잔뜩 집중하느라 조금 방심했던 아서는 그것에 어깨를 얻어맞을 뻔했다. 맞으면 좀 얼얼하긴 했겠군.

  어구가 부딪치고 끌리는 소리, 이런 저런 명령을 외치는 선원들의 소리, 무시무시하게 적대적인 파도 소리, 은퇴 연령이 지난 낡은 배가 지나치게 거친 물결을 감당하기 어려워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서는 빙점에 가깝도록 낮은 온도의 물 속에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제기랄, 해안경비대는 왜 이렇게 안 와?"

  배 위에서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배는 정비 불량에 너무 추운 날씨가 겹쳐 엔진이 고장난 상태로 높은 파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선장의 오판 때문에 다른 배들로부터 수십 마일 떨어진 해역에 혼자 고립된 채. 해안 경비대에 구조 요청도 했고, 그나마 가장 가까이 있던 다른 어선도 구조신호를 듣고 조업을 포기한 채 구하러 달려오고 있었지만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둘 다 너무 멀다. 제 때 도착할지 의문이었다.

  "꽉 잡고 버텨! 서바이벌 수트는 다 입었나?"

  여기저기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전신을 감싸는 방수 서바이벌 수트도 한겨울의 베링 해에서는 거의 소용이 없다. 구명정에 타지 못하고 맨몸으로 바다에 빠지면 곧장 몸은 쇼크 상태에 빠지고, 차가운 바닷물 때문에 심장마비가 오기까지 5분을 버티기도 어렵다.

  아서 커리는 그런 보통의 경우로부터 철저히 예외적인 존재였지만.

  배가 다시 한 번 높은 파도를 타넘으며 기우뚱거리고, 한쪽 뱃전이 거의 물에 닿을 만큼 기울었다가 겨우 천천히 다시 섰다. 그 과정에서 갑판 위의 모든 것들이 우르르 쏠리고, 사람들이 뒹굴면서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에도 아서가 듣고자 하는 목소리는 섞이지 않았다. 정말로 말수가 적은 꼬맹이로군.

  아서가 그 이름을 확신할 수 없는 소년을 처음 본 것은 그로부터 닷새쯤 전 더치 하버의 조용한 바에서였다. 오후 다섯 시는 영업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겨우 문을 열기는 했지만 손님이 거의 없었다. 아서 자신을 제외하고는 단 한 테이블만 찼고, 거기 자리를 잡은 두 남자는 테이블 위에 꾸깃꾸깃한 서류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이름."

  "클락."

 앳된 목소리로 하는 대답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스미스."

  급조한 것이 너무 뚜렷한 이름이라, 이름을 물었던 남자의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핏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한 번 들썩였다. 그리고 자칭 클락 스미스의 목소리를 들은 아서는 귀를 쫑긋하며 그 쪽을 쳐다보았고, 곧 의견을 바꾸었다. 두 남자가 아니라 한 남자와 한 꼬맹이였다. 소년은 나이에 비해 널찍한 어깨를 움츠렸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다에서 수십년을 구른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몇 살이야?"

  수염을 기른 남자는 건성으로 묻더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답했다.

  "됐어, 스물 둘이라고 해라."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했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뭔지 모를 얼룩이 묻고 구깃구깃한 고용계약서의 빈 칸에 가짜 이름과 가짜 나이를 알아보기 힘든 악필로 거침없이 적어내려갔다.

  "운전면허증 보고 확인했다고 치는 거야. 어차피 문제될 일 없어."

  소년은 다시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보자, 숙식은 물론 제공이고, 급여는 주급 500달러다. 아무 경력 없는 생초짜에게 주는 것치곤 정말 후하게 쳐주는 거야. 보통은 너 같은 건 태워주지도 않아요. 이미 퇴짜를 잔뜩 맞아서 잘 알겠지만. 오히려 수업료를 받아야 할 판이라고."

  아서 커리는 눈을 한 번 굴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 시즌의 대게잡이 급여는 저런 식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대게잡이가 허가되는 시즌은 길어야 한겨울의 단 2주일 뿐이었다.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200여척 되는 더치 하버의 어선들이 잡아들인 게의 총량이 그 해의 정해진 무게를 넘어가면 모두가 조업을 접어야 한다.

  이런 가혹한 조건 때문에 경쟁이 붙은 배들은 일단 시즌이 시작되면 빨리 남들보다 많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거의 쉬지 않고 대게를 잡았다. 이 10여일 동안 대게잡이들은 밤잠도 식사도 건너뛰어가며 수십만에서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가치의 대게를 잡아올렸고, 선원들은 자기가 탄 배의 어획량에 따라 미리 계약한 비율로 급여를 받았다.

  초보라면 배당이 아주 낮기야 하겠지만, 거기에 더해 운이 나빠서 타고 있는 배가 이번 시즌 최악의 어획량을 올리더라도 보통 대학 두어학기 등록금만큼은 나온다. 그래서 뺨에 수염도 제대로 나지 않은 외지 출신의 어린것들이 얼씬거리며 등록금을 벌어볼까 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 정도 벌이는 되어야, 거친 바다 위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하는 무서운 강도의 육체노동, 한 철에도 여러 명이 시체도 찾을 수 없게 죽어나가는 위험한 일을 감수할 만 하지. 그런데 저 사기꾼 같은 자식이 저런 꼬맹이의 목숨을 주당 단돈 오백에 빌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뱉어 놓고 보니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놈도 어린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말도 안 돼, 하고 소년이 말하면 아마 올려 줄 생각이었을 것이다. 두 배로 올리더라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인 돈이니까. 하지만 소년은 평생 싫다는 말은 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얌전하게 굴었고 남자는 씩 이를 드러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서 커리는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드르륵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다가가자 지저분한 수염을 기른 남자가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서는 자신의 육체가 주는 위압감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험악한 표정을 짓거나 손마디를 꺾어 보일 필요도 없다.

  "꼬마야."

  그 말에 소년이 고개를 들어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보송보송한 뺨이 분홍빛이었고 눈은 파란색이었다. 그리고, 맙소사. 가까이서 보니.

  "도대체 어디 출신이냐. 온통 햇빛과 잘 익은 곡식 냄새가 풍기는군."

  아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느닷없는 말을 들은 클락 켄트는 자기 옷깃에 코를 박아 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정말로 스몰빌 냄새가 나는 걸까. 나는 익숙해져서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단박에 알 수 있을까? 말만 들어도 그 그리운 냄새, 어려서부터 익숙한 햇살과 곡식 냄새가 똑똑히 그려졌다. 클락이 떠나올 때의 스몰빌은 막 수확철이 끝난 시기였다. 잘려나간 옥수숫대가 묶여 벌판에 누워 있고, 사일로는 꽉꽉 찼다. 햇살은 좋았고, 사람들은 마음이 넉넉해졌고,

  그리고 클락으로서는 조나단 켄트 없이 맞이하는 첫번째 가을이었다.

  "바다에 가 본 적은 있냐? 늙은이들과 아기들이 여름에 찰박찰박 노는 그런 에머랄드 색의 얕은 바다 말고. 이런 북쪽의 겨울 바다를 본 일이 있느냐고."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클락은 이 곳에 왔다. 스몰빌과 완전히 다른 곳. 난생 처음 보는 혹독한 환경과, 스몰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거친 삶이 기다리는 곳.

  갑작스레 나타나 클락을 추궁하려 드는 이 거대한 덩치의 남자는 아무렇게나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그 너머의 얼굴은 젊었다. 클락은 이 사람이 자기보다 몇 살이나 더 먹었기에 이렇게 어른처럼 구는 것인지 약간 반발심이 들기는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남자는 클락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우아하고 커다란 짐승처럼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 클락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선장."

  아서는 머리를 돌려 이번에는 나이든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런 조그만 걸 어디다 쓰려고 그러쇼. 게가 아니라 애 잡겠군."

  네 일에나 신경 써, 덩치 큰 애송이. 선장은 그렇게 받아치려고 했다. 그러나 기이하게 색이 옅고 동공이 바늘끝처럼 좁은 눈과 마주치자 베링해의 북풍을 정면으로 맞은 것처럼 혀가 얼어붙고 손발이 저렸다. 선장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잠시 침묵이 흐르고,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써달라고 졸랐어요."

  마침내 클락이 입을 열었다.

  "다른 선장들은 안 된다고 했고, 윌슨 선장님만 받아주겠다고 했어요."

  "다른 선장들이 안 된다고 한 건 이유가 있어서지. 아무리 일손이 부족해도 이런 위험한 일에 어린애는 쓰지 않아."

  클락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동작은 크지 않게, 누구도 위협하거나 싸움을 걸고 싶지 않다는 듯이. 완전히 일어난 클락은 인상보다 키가 커서, 시선은 아서의 눈높이보다 그리 많이 낮지 않았고 아직 덜 자랐는데도 벌써 당당하게 넓은 어깨는 활짝 펴져 있었다. 조금도 주눅들지 않은 침착한 눈은 아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괜찮아요."

  "덩치 문제가 아니야. 좀 어울리는 일을 해라. 패스트푸드라든지, 아이스크림이라든지, 네 또래 애들에게 그런 거나 팔러 가."

  그러자 클락은 잠자코 손을 뻗어 고용계약서에 쓰인 22라는 숫자를 짚어보였고, 아서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엄마 아빠는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아시냐?"

  클락의 반듯한 눈썹 사이에 주름이 패였다. 마사는 모른다. 클락은 캐나다를 종단하면서 몇 번 마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위험한 일을 할 기색은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마사는 아마 아직도 클락이 화이트호스의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줄 알 것이다. 여기서는 맑은 밤이면 오로라가 보여요, 엄마. 정말 아름다워서, 누운 채 올려다보고 있으면 마치 몸이 저절로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나 조나단은, 클락은 생각했다. 아마 조나단은 클락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말리고 싶어하겠지.

  클락의 그렇잖아도 어려서 초롱초롱하게 맑은 홍채에 물기가 돌았다. 일자로 굳게 다문 입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표정으로 보아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은 화제를 꺼냈다는 것은 아서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아서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 소년은 잠시 그대로 있었으나 다시 눈을 들어 아서를 쳐다보았다.

  "나한테는 이 일이 필요해요."

  여전히 공격적이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도사린 굳은 결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정말 고맙지만, 나는 괜찮아요."

  응석을 부리려는 기미가 전혀 없는 목소리로 소년은 말했다. 그 태도와 목소리에 서린 무엇인가가 아서를 물러나게 했다. 누구에게나 각자 짊어진 십자가가 있는 법이고, 아서는 그것을 존중하기로 했다. 소년의 태도에는 아서로 하여금 자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리하여 윌슨 선장은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고, 모자란 일손을 싼 값으로 채우기 위해서 땅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어린아이를 어울리지 않는 배에 태웠다. 그리고 아서는 일단 신경을 끊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건 정말 안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야.

  험악한 파도가 물 속 깊은 곳까지 휘젓는 것이 느껴졌다. 바다 생물들조차 술렁이고, 불길한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서는 귀를 기울였지만 아직도 구조의 손길은 멀었다. 적어도 반 시간은 더 버텨야 한다.

  갑판 위에서는 다급하게 구명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큰 파도를 타넘은 배가 크게 기우뚱거리자 한 차례 비명이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비명이었기 때문에 아서는 몸을 바로 세우며 긴장했고, 예상대로 첨벙 소리를 내며 누군가 거친 물 속에 빠졌다. 익사할 위험은 없다. 서바이벌 수트는 물에 잘 뜨도록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숨을 쉴 수 있다고 해서 극저온의 물로 인한 쇼크와 저체온증, 심장마비의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3분 내로 선원들이 이 불운한 동료를 건지지 못한다면 아서가 무엇이든 해야 할 것이다.

  곧이어 구명정이 던져졌다. 철썩 소리를 내면서 수면에 격돌한 구명정은 물에 빠진 선원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제대로 펼쳐졌지만 선원은 그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에 빠질 때의 충격으로 기절했든지, 아니면 쇼크 때문에 그 짧은 거리도 헤엄치지 못할 상황일 것이다. 엉망진창인 갑판 위 상태와 자기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동료 선원들의 상황을 고려한 아서는 물을 박차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안 돼, 이 멍청아!"

  갑판 위에서 욕설이 울려퍼졌다. 아서가 귀를 쫑긋 세우는 순간, 두번째 사람이 물에 빠졌다. 아니, 물에 빠질 때의 자세를 보니 일부러 뛰어든 것이 분명했다. 그러게, 멍청이로군. 겨울의 베링해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는 밧줄과 도구를 써야 한다. 구하겠답시고 뛰어들었다가는 같이 죽을 뿐이다. 물에 닿자마자, 누굴 구하기는 커녕 자기 사지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아서는 혀를 차며 두 멍청이를 건질 준비를 했다. 일이 두 배로 늘었군.

  그러나 두번째로 뛰어든 사람은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에서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뛰어든 힘 때문에 조금 가라앉았다가, 둥둥 뜬 사람 그림자를 확인하고는 정신없이 휘저어지는 얼음 같은 조류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방향을 틀어 곧장 빠진 사람을 향해 헤엄쳐갔다.

  벼락같은 놀라움에 직격당해, 아서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클락, 저 맹랑한 꼬맹이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군.

  아서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깨달았다. 나는 괜찮아요, 하고 확신에 차서 대답하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그렇게 장담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노스윈드 호는 가까스로 침몰을 면했다. 날씨는 곧 나아졌고, 배는 물이 좀 차기는 했지만 겨우 엔진을 손봐서 항구로 돌아갈 만한 수준은 유지했다. 달달 떨면서 구명정에 몸을 맡기고 있던 두 선원도 구조되었다. 더치 하버에서 가장 초보였던 어린 클락 스미스는 동료를 구한 영웅이 되었지만 별 말도 없이 약속했던 푼돈만 벌어서 사라졌다. 아서는 첫날 펍에서 본 이후로 다시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때로는 억지로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다. 저런 존재는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서로 진짜 이름과 진짜 정체를 말해 줄 날이 올 것이다.

  때가 되면.





  아서는 흠뻑 젖어서 늘어진 칼-엘의 몸을 거친 암초 위로 끌어올렸다. 10년도 더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탄탄하게 넓어진 어깨와 가슴, 젖살이 빠지고 날카로워진 얼굴선이 이제는 완전히 어른의 것이다. 하지만 이목구비는 그대로였고, 한참 동안 월드 엔진과 사투를 벌이고 인도양의 물에 잠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넓은 벌판에 내리쬐는 여름 햇살과 익어가는 곡물의 냄새가 났다.

  이런 존재를 낳을 수 있는, 아니, 낳은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길러낼 수 있는 농촌이 다 있다니. 농촌에 대한 편견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아서는 생각했다.

  칼-엘은 의식이 없고 매우 지쳐 보이기는 하지만 호흡도 안정적이었고 지상의 어느 생명보다 강인한 심장도 제대로 뛰고 있었다. 아서는 한숨 돌리고는 여전히 아우성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서에게는 외계에서 온 손님 말고도 돌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 아마 칼-엘도 마찬가지이리라. 아서가 바다와 뭍 두 세계에 걸친 존재라면, 칼-엘은 외계와 지구의 두 세계에 걸친 존재이다. 아서에게 보살펴야 할 일곱 바다가 있다면, 칼-엘에게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 먼 곳에서 저 터무니없이 거대한 기계를 부숴야 했던 것이겠지. 그들은 아주 드문 존재, 두 세계의 교집합인 수호자였다.

  때맞춰 동쪽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구름이 갈라지면서 서서히 떠오르는 햇살이 창백하게 식은 몸을 조금씩 데우기 시작했다. 빛을 받자 벌써 눈에 띄게 핏기가 돌아오는 얼굴을 내려다본 아서는 다시 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칼-엘은 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 저 태양이야말로 칼-엘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일 테지.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번에 다시 우리의 길이 교차할 때까지, 안녕히.




(2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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