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삶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클락 켄트의 신체 기능은 최소한 심각하게 문제 있는 정도는 면한 상태가 되었다. 후하게 봐 줬을 때는 가까스로 정상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회복이다. 문제는 그 "정상 범주"가 지구인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숨 쉬고, 먹고, 자고, 제때 일어나고, 집 안에서 살살 걸어다니는 등의 일은 그럭저럭 해내고 있지만 어떤 일도 예전처럼 "슈퍼"하게 해내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도 계속 나아지고 있나 보다. 아마도 클락 켄트의 능력 중에 제일 먼저 초인적인 수준을 되찾은 것은 미각일 것이라고, 브루스는 직감했다. 저녁 식사로 내온 것을 한 술 뜬 클락이 평소보다 흰자가 확연하게 많이 드러난 눈을 치켜 뜨고 브루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것이다. 분노에 차서 노려본다고 할 정도는 결코 아니지만 명백한 원망의 의도가 섞인 눈초리. 일부러 고개를 약간 모로 틀고 눈가로 브루스를 따갑게 흘겨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받고 있자니 무슨 비난받아 마땅할 파렴치한 범죄라도 저지른 기분이 되어 (범죄라면 충분히 저질러 본 게 사실이지만 그 중 어떤 것도 '파렴치'하지는 않다는 것이 브루스의 은밀한 자부심 중 하나였음에도) 브루스는 물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지?"


 클락이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약 맛 나요."

 방금 떠넣은 리조또 한 숟가락을 삼키지 않고 문 채여서 한쪽 볼이 통통하게 부어 보였다. 덕분에 더더욱 토라진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고, 우물거리는 말투였다. 약 맛이라니, 참 귀신같이 알아채는군. 브루스 웨인은 속으로는 통탄했으나 그의 훌륭한 포커페이스는 1mm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자네가 진짜 트러플을 처음 먹어 보기 때문이 아닐까? 트러플이 원래 향이 좀 강하지. 몸에 좋은 고급 식재료야."

 "그거 말고 약 맛 나요."

 클락 켄트는 요지부동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브루스 웨인 씨가 저택 지하의 눅눅한 동굴에서 불법으로 조제한 크립토나이트 해독약을 곱게 간 맛이 나요."

 얼씨구. 고르는 단어 하며 비꼬는 솜씨를 보니 이제는 곤죽이 되었던 뇌세포도 제법 회복이 된 모양이네. 박수라도 쳐 줄까? 브루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는데, 클락은 옆에서 티슈를 한 장 뽑아 들더니 고개를 돌리고 브루스에게 등을 보인 채 어깨를 꿈틀거렸다. 티슈에다 방금 그 까다로운 입에 한 술 겨우 떠넣었던 리조또를 고스란히 뱉어내는 것이다. 뱉고 나서 들으라는 듯이 웩,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뭉친 티슈를 리조또 접시 곁에 내려놓고는 입맛 버렸다는 듯 컵에 담긴 물만 딱 한 모금 마시더니 아예 베드 트레이를 통째로 몸에서 최대한 멀리 밀어버린다.

 "제가 자라던 시절은 시대가 달라서, 편식이 심한 어린애들은 엉덩이를 맞곤 했었죠. 저는 도련님을 키우면서 야만적인 체벌의 필요성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만, 도련님이 식탁에서 편식을 할 때만은 그런 충동을 느낀 일이 있었음을 고백해야겠군요. 부끄럽습니다.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는 점은 다행스럽지만."

 언젠가 알프레드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얼마나 인격자인가 하고 새삼 생각했다. 그 훌륭한 마음가짐을 본받아야겠지. 브루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약을 먹어야 빨리 낫지."

 서른다섯 살씩이나 먹은 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마냥 죽음에서 부활까지 하신 대단한 외계인과 정녕 이런 유아적인 대화를 해야만 한단 말인가. 브루스는 심한 굴욕감을 느꼈으나, 알프레드 말마따나 엎어놓고 엉덩이를 두들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른답게 대화를 해야지.

 "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어떤 약도 먹은 적 없어요."

 이상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클락은 항의했다.

 "그거야 자네가 크립토나이트 중독 상태로 심장 관통상을 입기 전 얘기가 아닐까?"

 그 말에 클락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그 끔찍했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넉넉한 크기의 목욕 가운을 입고 있어서 맨가슴이 절반쯤 보였다. 깊이 파인 가슴골 위를 부드러운 털이 덮고 있는 피부는 이제 흠 없이 말끔하다.

 "그것도 이젠 괜찮은데."

 "하지만 여전히 힘이 돌아오질 않잖나."

 혹시, 그 날 밤에 자꾸 크립토나이트 가스를 마시게 만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 크립토나이트에 오래 노출된 영향이 남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브루스는 손수 조제한 크립토나이트 해독제를 클락에게 주고 있었다. 크립토나이트로 창과 가스 폭탄을 만들었던 그 지식과 경험을 이용해서, 크립토나이트 성분을 체외로 배출하고 해독하는 약을 연구했던 것이다. 클락 켄트가 아직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동안에 만들어 둔 약이었다. 당시로서는 거의 무의미해 보였던, 작고 단단한 희망을 가지고.

 브루스 웨인은 모든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하니까.

 "힘도 차차 돌아오겠지요. 이젠 아픈 곳도 없고,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니까요."

 그러나 무엇이든 대비하는 브루스 웨인도 클락 켄트가 이런 고집쟁이인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매번 끼니마다 주는 약을 당연히 꼬박꼬박 잘 먹고 있는 줄 알았다. 알프레드가 쓰레기통에서 이틀치 약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고 슬쩍 귀띔해 주기 전까지는. 그걸로 잔소리를 했더니 또 하루 이틀은 얌전해 보였는데, 결국 유능한 알프레드가 침대 옆 협탁의 서랍 가장 안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하얀 알약을 대여섯 개 찾아냈다.

 어린애같은 구석이 있어.

 많이 있습니다. 원래 그런지 심각한 신체손상의 여파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도저히 말로 해서 될 일 같지 않다는 합의에 도달한 알프레드와 브루스는 이번엔 약을 곱게 갈아서 클락의 리조또에 꼼꼼하게 섞어 냈다. 혹시나 하고 약 맛을 더욱 숨기기 위해 일부러 향이 강한 트러플 리조또를 만들었는데, 노력이 무색하게도 귀신같이 첫 술에 바로 알아차린 클락이었다.

 "농부의 아들인 주제에 편식하는 법이 어디 있나? 농부의 피땀을 생각해야지."

 클락을 상대하다 보니, 자기는 뇌손상을 입은 적이 없음에도 자꾸 같이 클락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는 브루스였다. 급기야 그들 모두의 크립토나이트인 부모를 들먹였지만, 클락은 동요하지 않았다.

 "음식은 가리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음식이 아니잖아요, 뭔지도 모르는 약이지. 너무 쓰고 맛이 없고 게다가 불쾌하다고요. 임상 실험도 안 한 건데 부작용이 있으면 어떡해?"

 "클락."

 폭발할 뻔한 성질을 가까스로 제어한 브루스가 이름을 불렀다. 이를 악물고 있어서 의도보다는 말투가 좀 거칠게 나가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최선의 노력을 했다. 클락은 뚱한 얼굴로 브루스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네, 웨인 씨."

 전에는 언제 봤다고 허락도 없이 브루스라고 잘도 부르더니, 이제 와서 웨인 씨라니. 이건 분명히 반항심을 담은 것이었다. 그래도 브루스는 모르는 척 했다.

 "잘 생각해 봐, 지금 자네 상태는 정상이 아니야. 다시 죽을까 걱정되는 상태는 면했지만 인간치고도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는데다, 자꾸만 감정 조절을 못하고 어린애처럼 굴고 있지 않나. 그것도 아직 뇌기능이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야. 몇 달이나 죽어 있던 뇌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무덤에서 꺼내온 후 하루이틀 동안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클락은 계속 깜빡깜빡 의식이 나갔다 들어왔다 했고, 깨어 있을 때도 똑바로 앉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숟가락질도 제대로 못해서 자꾸 흘리는 데다 간간이 더듬거리며 뱉는 짧은 말은 혼란스러웠고 주술조차 제대로 맞지 않았다. 계속 이런 상태일지,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막막해서 얼마나 걱정했던지.

 하지만 클락은 눈부신 속도로 회복했다. 그 회복에 브루스의 크립토나이트 해독약이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락이 약을 거부할 정도로 제정신을 차리기 전 군말없이 약을 받아 먹을 적에 회복 속도가 더 빨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않고 자연 치유되기만 기다리는 건 갑갑하지. 어서 회복되어 돌아가고 싶을 것 아닌가, 캔자스의 어머니에게-."

 그리고 메트로폴리스의 연인에게. 브루스 웨인은 흐지부지하게 말끝을 흐리는 일이 드물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말이 목구멍에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돌아갈 수 있어요. 걷고 움직이는 데는 문제 없잖아요."

 "쉽게 지치지 않나. 아직 위험해,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질지도 모르지. 약을 잘 챙겨 먹어. 회복된 게 확실해지면 돌려보낼 테니까."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클락은 정상이 아니었다. 몸이 그런 것만큼이나 뇌도. 브루스가 아는 클락이라면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면서 엉뚱한 고집을 부리는 동시에 다른 쪽으로는 또 묘하게 순종적으로 굴지 않을 것이다. 걸을 수만 있으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만나겠다고 했겠지. 그런데 클락은 틈틈이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브루스의 만류를 뿌리치고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진짜 어른처럼 책임감 있게 혼자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날 수 없는 상황에서 캔자스까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는 기억하고 있을까? 클락의 사고 능력이 어느 정도로 회복됐는지 정확히 측정할 수가 없었다. 아직 원래 수준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그러니까 인내심을 가져야지.

 브루스는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클락의 베드 트레이 위에 기울여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새끼손톱 반 정도 크기의 둥그스름한 알약이 도르르 딱 한 알 굴러나왔다. 그리고 브루스는 다시 트레이를 클락 쪽으로 밀어놓았다.

 "약 먹고 어서 나아야지."

 "고맙지만 안 먹어도 괜찮아요."

 "먹어야 돼."

 "안 먹어도 돼요."

 "먹어."

 "싫어."

 둘 다 말이 점점 짧아지면서 목소리는 커졌다. 브루스의 눈은 점점 더 가늘어지고 클락의 입은 점점 더 튀어나왔다.

 "약 안 먹어도 괜찮아요! 나아지고 있다고요. 나는 이런 약 한 개도 필요 없어요."

 휘두른 클락의 손이 브루스를 탁 밀쳐냈다. 덕분에 브루스가 가볍게 쥐고 있던 약병이 날아가 침대 위에 떨어졌다. 엄청난 비용과 희귀한 재료와 브루스의 며칠치 밤잠을 갈아넣어 만든 귀한 약인데. 참다참다 발끈한 브루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클락의 팔을 잡아서 멈추게 했다. 그러나 클락은 즉각 떼쓰는 어린애처럼 버둥거리며 브루스를 떼어내려고 들었고, 그 난리통에 침대 위에 올려졌던 베드 트레이가 와장창 침대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딱 한 술 뜬 리조또 역시. 러그를 다 버리겠군, 하는 생각이 짧게 스쳐지나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브루스는 침대 위를 무릎으로 짚고 클락의 양 팔을 단단히 잡아서 눌렀다. 체중으로 밀어붙이자 클락은 높게 북돋아 놓은 푹신한 베개 위로 반쯤 눕게 되었다.

 "정말 괜찮은지 보자. 괜찮으면 나 따위는 쉽게 집어던질 수 있겠지? 어떤가?"

 제압당한 클락은 기를 쓰고 꿈틀거렸지만 꽉 잡혀 침대 위로 눌린 팔은 꼼짝도 못했고 다리도 브루스가 짓누르자 반항이 차단되었다. 숨이 조금 거칠어졌지만 결국 클락은 포기하고 베개 위에 머리를 얹고 누운 채 얌전해졌다. 심통이 난 듯 씩씩거리기는 했지만 그뿐이다.

 그것 보라니까. 어딜 감히 날 이겨먹으려고 들어. 의기양양해진 브루스는 클락의 팔을 한 손에 모아잡고, 남는 손으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는 약병을 더듬어 잡았다. 대충 쏟아서 그 중 한 알을 집어낸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집은 알약을 클락의 입술로 가져다 대자 클락이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반항적인 눈초리를 했다.

 "제발 좀."

 정말이지 말 안 듣는 똥강아지 같군. 혀를 차며 브루스는 억지로 클락의 입술 사이에 약을 들이밀었다. 앙다물린 이가 약에, 따뜻하고 축축한 입술이 브루스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브루스는 알약으로 클락의 이를 톡톡 두드렸다.

 "밤 새도록 이러고 있을 거야? 누가 이기나 보자."

 브루스가 으르렁거렸다. 조금 더 버티다가, 힝, 하고 클락이 억울한 듯 흐느끼는 소리를 냈고 그 틈을 타서 살짝 힘이 빠진 이 사이로 브루스는 우악스럽게 약을 밀어넣었다. 손가락이 이 사이로 파고들면 혹시 물어버리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클락은 잘근잘근 제법 이를 세워서 불만을 표시하기는 했어도 정말 상처가 날 정도로 꽉 물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잇자욱 좀 나는 정도로 그칠 것이다. 정말로 상처입힐까 걱정이 되는 것이겠지, 언제나 모질지 못한 성격이니까.

 정말 개 약 먹이는 것 같군. 집게손가락을 이용해서 가능한 한 혀 안쪽까지 약을 밀어넣으며 브루스가 생각했다. 이렇게 하고 촉촉한 코를 훅 불면 알약을 꿀꺽 삼키곤 했는데, 하고 어린 시절 애견을 떠올린다. 최대한 안으로 밀어넣은 브루스가 알약과 함께 클락의 혀를 꾹 눌렀다.

 "삼켜."

 "흐으어엉."

 얼굴을 잔뜩 찡그린 클락이 비참하게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이 조그만 약 한 알 먹는 게 뭐가 그렇게 억울해! 죽는 것도 억울하지 않다는 듯 애처롭게 웃던 슈퍼맨은 어디 갔어! 참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클락의 혀가 꿈틀거리며 약을 밀어내려고 안간힘 쓰는 것이 고스란히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잔말 말고 삼키란 말이야."

 클락의 양손목을 잡았던 손을 동원해서 브루스는 클락의 턱을 쥐었다. 덕분에 손이 풀려난 클락도 브루스의 손목을 붙잡고 떼어내려고 시도했지만 어림없었다. 턱을 쥔 손과 혀를 누르는 손 양쪽 모두에 꽉 힘을 주자 드디어 클락의 목젖이 크게 움직이며 꿀꺽 삼키는 동작을 했다. 손가락 끝에 걸리던 약도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하도 속아서 브루스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입 안에 넣은 손가락으로 클락의 혀 위, 입천장, 치열, 그리고 혀 아래까지 꼼꼼하게 더듬어 보았다.

 "정말 삼켰어? 삼켰지?"

 침실 문이 달칵 열린 건 그렇게 브루스가 과업 성공을 막 확신하던 순간이었다. 문간에 우뚝 선 것은 물론 알프레드이다. 한쪽 팔에 긴 냅킨을 착착 접어서 걸고 있었는데, 둘의 꼬락서니를 보더니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치솟았다. 입술은 더욱 얄팍해져 거의 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알프레드의 그 표정을 본 순간.


 브루스 웨인은 갑자기 머리가 차게 식으면서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알프레드의 시선으로 이 난장판을 생각해 보았다. 격정을 못 이겨 내던져진 저녁식사 트레이, 시트가 온통 주름이 지도록 침대 위에서 뒹군 두 남자, 게다가 다리를 얽고 클락을 온 몸으로 짓누른 채로 그의 입에 손가락을 억지로 처넣고 있는 이 상황, 내려다보니 클락은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을 매달고 붉게 부풀어오른 축축한 입술을 하고는 약간 정신이 나간 것같이 묘한 눈으로 멀뚱하니 알프레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원체 잘 붉어지는 뺨도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약을 갖고 씨름을 하느라 그렇잖아도 클락에게는 헐렁했던 목욕 가운 앞섶이 크게 벌어져 가슴이 다 드러나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켄트 씨."

 지극히 싸늘한 목소리로 알프레드가 말했다.

 "지금 이게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신 상황인지?"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클락은 어리둥절해져서 생각해 보았다. 이미 약은 목구멍으로 넘어간 후인 걸. 게다가 도와달라고 해 봐야 알프레드는 약이나 더 먹이려고 할 사람인데 왜 브루스가 아니라 나한테 도와줄까 묻는 걸까?

 "앙여."

 어쨌든 별 도움 될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 여전히 입에 브루스의 손가락을 문 채로 클락이 우물우물 대답했다. 알프레드는 일단 범죄적 상황은 아닌가 보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겠지.

 "잠깐만요, 알프레드."

 몇 초 동안 굳어 있던 브루스가 분기 실적이 급감한 주총 때나 낼 만한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알프레드를 불렀다. 브루스 웨인이 그렇게 심각한 목소리를 내는데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지만, 알프레드야말로 그 짧은 명단의 가장 위를 차지할 만한 사람이었다.

 "실례했습니다.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나기에."

 "알프레드!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알프레드는 그러나 손사래를 쳤다.


 "됐으니 하던 것 계속하시죠, 한 시간쯤 후에 다시 와서 치우겠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브루스의 목소리가 다급해졌지만, 알프레드는 더 들을 필요 없고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다는 단호한 태도로 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브루스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 * *



 브루스는 그런 심각한 오해를 받지 않더라도 때때로 울적해지고 잠을 설쳤다. 클락 켄트가 억울하게 죽어 있는 상태일 때는 그 사실 때문에 그랬고, 클락 켄트가 기적처럼 살아돌아온 후에는 그가 영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랬으며, 제법 정상에 가깝게 회복한 지금은 자꾸 그 깎아놓은 듯 잘생겼지만 어딘지 평소보다 맹한 얼굴이 시도때도 없이 떠올라서 그랬다.

 정작 드잡이를 하는 동안에는 약 먹이는 데 집중하느라 대충 지나갔지만, 클락의 입술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고 뜨겁고 촉촉했다. 당연히 많은 것을 연상시키는 입술이었으며, 지나고 나니 약이고 뭐고 손가락을 꽉 감싸서 조이던 그 입술과 밀어내겠답시고 자꾸 손톱 아래의 연한 부분을 꾹 누르던 혀의 느낌만이 남았다. 딱 적당히 자극될 만큼만 손가락을 잘근거리던 이는 어떻지. 위쪽 치열은 고르고 예뻤지만 아래쪽은 제멋대로 삐뚤빼뚤했다. 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얄밉도록 거의 완벽한 클락 켄트의 몸에서 유일하게 장난스럽고 허술해 보이는 부분이었다. 그 아랫니를 보이는 순간 갑자기 클락 켄트는 보통 사람처럼 취약하고 허점이 많아 보이곤 했다.

 잠을 설친 브루스는 아침에 중요한 통화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클락의 아침 식사를 알프레드가 가져다 주도록 했다. 클락이 정신을 차린 이후로, 출근 전의 아침 식사와 퇴근 후의 저녁 식사는 꼭 브루스 본인이 챙겼었는데도.

 "아침은 깨끗이 비우셨지만 약은 안 드시네요."

 알프레드가 한숨을 섞어 브루스의 테이블에 약병을 내려놓았다.

 "도련님이 설득을 해 보시지요. 어제는 잘 먹이신 모양이던데."

 별 수 없이, 브루스는 약병을 들고 클락이 있는 침실로 갔다. 침대가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클락은 브루스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손에 들린 약병을 보자 다시 눈살을 확 찌푸렸다. 천천히 다가간 브루스는 클락의 눈이 아니라 이마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 어디쯤을 쳐다보며 약병을 내밀었다.

 "어제처럼 기운 빼기 싫으면 이번에는 약 얌전히 먹는 거야."

 클락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가 꺾여올라오더니, 두 개의 푸른 눈이 브루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어제처럼 눈을 하얗게 뜨고 못마땅해 하지도 않았고, 싫다고 고개를 젓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약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민 것도 아니다.

 클락은 브루스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은 일을 했다.

 방 안의 다른 것은 모두 가만히 있는데, 클락의 입술만이 움직였다. 순순히 입을 벌렸던 것이다. 입술, 그리고 그 안의 이 사이로 분홍빛 혀, 어제 브루스가 퍽이나 격정적으로 주물렀던 혀가 살짝 내밀어졌다. 질감과 색채가 차례차례 대비되는 입술과 이와 혀. 그리고 각오했다는 듯이 클락의 눈이 질끈 감겼다.

 과연 주문한 대로 얌전한 태도이기는 했지만, 브루스는 뒷목이 선뜻해졌다. 역시 어제 너무나 잘못된 방법으로 약을 먹였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후회라기에는 너무 번쩍거리는 것이었다.

 자네 손으로 먹어야지, 물도 충분히 마시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옳은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첫마디가 목에 걸려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말은 나오지 않는데 손가락은 느릿느릿 움직였다. 누가 누구에게 순종적인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브루스는 약을 한 알 꺼냈고, 그것을 쥔 손가락이 어제와 달리 환영하듯 벌어진 입 안으로 다시금 빨려들어갔다. 약을 삼키느라 입 안의 근육들이 크게 꿈틀거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무슨 맛있는 것이라도 먹은 듯이, 약을 삼킨 후에도 클락의 혀가 브루스의 손가락을 슬쩍 휘감았다가 재빨리 물러났다. 클락의 머리가 천천히 뒤로 빠지면서 브루스의 손가락을 놓아준다. 마지막으로 입술이 손가락 끝에 살짝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브루스?"

 클락이 속삭이듯이 불렀다. 조금 심통이 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간질거리는 목소리였다. 클락이 어떤 표정을 짓고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지는 순간, 그제서야, 브루스는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클락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저하며 눈을 뜨고 보니 클락의 눈꼬리가 살짝 휘어 있다. 그새 반짝 뜨고 있던 파란 눈동자는 어제보다는 확실히 더 총명하게, 어른의 것다운 빛을 냈다. 그것 봐, 내가 뭐라고 했나. 약을 먹는 게 좋다고 했지. 브루스는 희미하게 생각했지만 여전히 말은 나오지 않았다. 뻣뻣해져 있는 브루스와 눈을 정확히 맞추고 클락은 반은 장난치듯, 반은 정말로 궁금한 듯이 물었다.

 "정말로, '그런 게 아니'에요?"


 하느님,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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