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던스 스코터스는 중세 스코틀랜드의 뛰어난 스콜라 철학자였다. 프란치스코 회 소속의 사제였으며, 대범하게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브루스 웨인은 언제나 스콜라 철학보다는 누군가의 죽음에 더 관심이 있었다. 오래 전 아직 나이 어리던 그의 꿈 속에 가끔 나타나 밤잠을 설치게 했던 것도 이 학자의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1308년 아직 이른 나이에 급사한 스코터스는 교회 영묘에 묻혔다. 일설에 따르면, 다른 매장자를 맞이하기 위해 며칠 후 영묘가 다시 열렸을 때 스코터스의 시신은 석관 밖으로 기어 나온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죽은 것이 아니라 발작 증세로 일시적인 폐쇄 상태를 겪었던 스코터스는 무거운 석관 속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렸고, 초인적인 발버둥 끝에 겨우 관을 열었지만 너무 지친 나머지 이번엔 진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시신의 손가락 끝은 탈출을 위한 최후의 몸부림 때문에 온통 피가 맺히고 해져 있었다고 한다.

 의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사람의 심장이 완전히 멎은 것인지 아니면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로 박동이 희미해진 것인지 정확히 구별할 방법이 없었다. 한 번 사망 판정을 받은 '시체'가 매장되기 직전에 다시 깨어나는 일은 드물기는 해도 분명 존재했다. 너무 늦게 관 속에서 깨어나 두번째 죽음을 홀로 맞이한 운 나쁜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더 때 이른 죽음을 목격하는 데 익숙했다. 갑작스럽게 찾아들기 직전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젊은 죽음들. 그런 죽음일수록 참혹한 상처를 남긴다. 죽은 이들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장의사의 세심한 도움을 받은 후에도 어린 아들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마사 웨인이 그러했듯. 토마스 웨인과 마사 웨인의 관은 조문을 받는 내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일 열릴 장례식에서는 관이 열려 있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가장 평온하게 숨을 거둔, 그래서 가족들이 기꺼이 관을 열어 놓고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한 시신에도 영혼이 떠나버린 껍질 특유의 어색한 경직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공을 들여 손을 보고 꽃으로 둘러싸더라도 공기중을 은밀하게 떠도는 죽음의 기운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

 그러나 클락 켄트의 일생에는 '보통'이라고 부를 만한 구석이 드물었다. 출생이 그러했듯 죽음마저도 비범하다. 세상을 구한 대가로 바친 목숨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그의 얼굴은 입술에 핏기가 가신 것 외에는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력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생기가 영혼이 떠나고 기능을 멈춘 육신에도 한동안 남아 있는 것인지. 그는 마치 내일 받게 될 작별 인사마다 미소를 지으며 일일이 답례를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마 몇 시간 후에 열릴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들 중 대부분은 클락 켄트의 정확한 사인을 모를 것이다. 그 치명적인 상처를 똑바로 쳐다본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나 브루스 웨인은 그 드문 몇 사람 중의 하나였다. 둠스데이는 슈퍼맨의 가슴에 자랑스럽게 자리잡은 문장을 찢어놓으며 갈빗대를 몇 대 부러뜨리고 정확하게 심장을 꿰뚫었다. 도저히 살아 있을 수가 없는 상태라는 것은 그 상처를 보자마자 알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잘 다려진 셔츠 아래의 넓은 가슴이 크게 손상된 그대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생전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뺨도 손을 대 보면 주위를 둘러싼 밤공기와 비슷하게 차가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 얼굴은, 게다가 깨끗하고 단정한 옷으로 상처가 가려진 상태로는 마치......

 브루스 웨인은 머릿속을 점령한 어처구니 없는 생각 때문에 불편한 한숨을 내쉬었다. 실낱처럼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의 가닥이 처음으로 구체화 된 형태로 떠오른 것은, 슈퍼맨이 둠스데이와 함께 고고도에서 핵미사일에 직격당했었다는 사실을 국방부로부터 확인받은 때였다.

 슈퍼맨은 그러고도 살아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돌아왔을 때는 갓 깎아낸 대리석처럼 완벽했지. 다름아닌 배트맨이 직접 크립토나이트로 입혔던 뺨의 긴 상처마저도 얄미울 만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브루스의 계산으로는 핵미사일을 맞은 슈퍼맨이 고담의 항구로 돌아오기까지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때 슈퍼맨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핵폭발로 인한 타격이 어느 정도였든 그는 고작 20분 만에 회복했다.

 물론 핵미사일에 맞았던 때의 슈퍼맨은 크립토나이트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다. 그게 결정적인 차이일 것이다. 생사를 가를 만큼 결정적인.

 하지만, 그래도.

 브루스 웨인은 클락 켄트의 시신을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기 전에 아주 유심히 상처를 관찰했다. 참혹하게 벌어진 상처가 아주 느린 속도로나마 아무는 기색이 있는지.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숨이 들고 나지는 않는지, 멈추었던 심장이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는지, 감긴 눈꺼풀 너머의 눈동자가 먼 다른 세상의 꿈을 꾸며 떨리지는 않는지.

 오랫동안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조용하고 어두운 거실에서 불편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은 브루스 웨인 뿐이었다.

 스코터스의 시대와 달리, 양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의 의사들은 이제 사망 판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틀림이 없다. 심장 박동과 호흡, 체온과 장기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기술은 20세기 중반 이후로 완성단계에 이르러 다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시체로 판정해 땅 속에 묻어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클락 켄트는 비록 외견상으로는 지구인과 아주 비슷해 보여도 크립톤 인이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의 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 아주 먼 별에서 왔다. 지구인만 다뤄 온 지구인 의사가 그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는 데 실수를 한다 해도 그렇게 이상할 건 없지 않나.

 그럴 리가 없지.

 그럴 수도 있지.

 머릿속에서 두 가지 가능성이 각각 생명을 얻은 것처럼 수십 수백 번을 충돌했다.

 곧 해가 뜰 것이다. 클락 켄트의 심장이 부서진 후로 뜨는 세 번째 태양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주하는 마지막 태양이기도 하다. 이날 해가 지기 전에 클락 켄트는 빛 한 오라기 들지 않는 어두운 땅 속 6피트 아래에 묻힐 것이었다.

 해지고 피가 맺힌 손가락.

 브루스 웨인은 이미 많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꿈 속에서 볼 죽은 사람들의 얼굴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거기에, 너무 늦게 소생한 데다 빛을 못 봐 약해진 상태로 관뚜껑을 긁어대느라 피가 맺힌 외계인의 손가락까지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브루스 웨인은 내일 있을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초대받을 이유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스몰빌 출신의 젊은 기자와 고담의 부유한 기업가 사이에는 아무런 친분이 없다. 렉스 루터의 파티에서 아주 짧고도 가시돋힌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그의 마지막을 목격하고 그와 함께 싸웠던 전우로서 초대받을 수도 없었다. 이곳에 누운 것은 전세계의 애도를 받는 수퍼맨이 아니라 조나단 켄트와 마사 켄트의 아들이었다. 스몰빌 출신의 청년, 말수가 적고 비밀이 많았던.

 달도 저문 가장 어두운 시간에 브루스 웨인이 초대받지 못한 켄트 집안의 거실에 혼자 서 있는 것은, 조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클락 켄트에게 작별 인사가 아니라 다른 것을 주러 왔다.



***



 알프레드가 죽음처럼 조용한 배트케이브에 다시 내려왔을 때는 해가 막 뜨려는 새벽녘이었다. 그는 진하게 내린 커피와 간단한 아침 식사를 내려놓고 무슨 변고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배트케이브 안을 한번 휘 둘러보았다. 평화로운 밤이었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배트케이브를 이루는 사물의 일부라도 된 듯이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앉아 있는 브루스 웨인의 얼굴마저 알프레드의 염려와 달리 평온했다.

 "범죄자들마저도 조의를 표하는 것 같군요."

 누구에 대한 조의인지는 굳이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밤거리는 조용했다. 고담뿐 아니라 미국 전역이 그랬다. 메트로폴리스에서 열린 슈퍼맨의 장례식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몰렸고, 고담에서도 사람이 모일 만한 광장마다 촛불을 켜든 사람들이 모여들고 담벼락에는 S자 마크가 넘쳐났다. 흥, 가볍게 콧소리로 대답한 브루스 웨인은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뭘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알프레드는 물었지만 이번에도 브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농담으로도, 어줍잖은 거짓말로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가능성이 너무 낮은 일이었고, 알프레드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젊은 주인이 내뿜는 수많은 집념에 시달려 왔다. 스스로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 일로 굳이 늙은 집사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알프레드는 언제나처럼 현명하게도 더 캐묻지 않고, 브루스의 곁에서 메크 수트를 손보기 시작했다. 슈퍼맨이 어지간히도 제대로 부숴 놓은 덕에 길고 까다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조용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고 알프레드는 다시 말했다.

 "도련님이 스몰빌을 방문하신 사이에 무기고와 장비들을 점검해 봤습니다. 위치추적기 하나가 없어졌더군요. 요즘 쥐는 기계도 훔쳐가는지."

 사라진 위치추적기는 스몰빌 묘지의 땅 아래, 클락 켄트의 차가운 손 안에 쥐여 있다. 끊임없이 강력한 위치 신호를 보내면서. 그리고 브루스 웨인이 직접 한 개조를 통해서, 그것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면 배트케이브에 또 다른 신호가 즉각 울리게 되어 있었다. 아주 크고 분명한 종소리가 울릴 것이다.

 렉스 루터는 조롱했다.

 "신은 죽었지. 한 번 울린 종은 되돌릴 수 없어."

 과연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종이 울릴 수는 있지 않은가.

 그리고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을 것이었다.



(201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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