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어 쓸 생각이 없었는데 이 때 마침 #달이_떴다로_시작하는_글쓰기 태그가 트위터 트렌드로 돌았기 때문에 갑자기 생각나서 썼던 것입니다.








 달이 떴다.

 달빛을 방해할 만한 인공 조명이 적은 스몰빌에서는 더욱 기이할 정도로 크고 밝아 보이는 보름달이었다.

 마사 켄트는 이 날도 한참이나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든 참이었다. 겨울로 접어든 공기는 차가웠고 마사의 마음은 그보다 더 차가웠다. 20년이나 마사를 알아 온 나이 든 의사는 퍽 걱정하는 얼굴로 가벼운 항우울제와 수면유도제를 처방해 주었지만, 약의 조력을 받아 겨우 찾아온 잠 속에서 마사는 언제나 클락의 말간 얼굴을 보았다. 끝까지 어머니를 생각해서일까, 클락은 꿈 속에서조차 마사에게는 괴롭거나 슬픈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살며시 웃고 있는 얼굴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사의 비통함이 새털 하나만큼이라도 줄어들 리는 없었지만. 불면이 더욱 괴로운지, 아니면 꿈 속에서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운 얼굴을 보는 것이 더 괴로운지 마사는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잠결에 무언가를 무겁게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마사는 얕고 서글프고 두서 없는 꿈에서 빠져나왔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너머의 달빛이 밝아서 잠이 덜 깬 멍한 눈으로도 시계를 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계바늘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주위는 여전히 차갑고 조용했다.

 이런 시간에 누가 왔을 리가 없지. 어쩌면 꿈 속에서 들은 소리일지도 모른다. 클락의 관뚜껑에 못질을 하던 소리와 닮았다고, 마사는 생각했다. 마사는 들어줄 사람 없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고 눈을 꽉 감았다.

 그 때, 다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층에서는 러스티가 그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컹컹, 망설이듯 짖었다.

 마사가 눈을 번쩍 뜬 후에도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다. 마사의 가슴에 무서운 불안이 스며들었다. 이 시간에 도착하는 소식은 무엇이건 좋은 것일 리가 없다. 클락의 소식을 전해 주러 로이스가 눈물 젖은 얼굴로 왔을 때도 바로 이런 끔찍한 시간이었다.

 마사는 침대 속에서 몸을 더욱 웅크렸다. 대답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으면 그냥 가 버릴 지도 모른다. 전하려는 소식이 무엇인지 영원히 모르고 넘어갈 지도 모른다. 무엇도 알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소리는 집요했다. 침착하게, 일정한 간격으로, 서두르지 않고. 하지만 마사가 내려올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이.

 결국 마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느린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 때까지도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확실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사는 누군지 물을 기력도 없이 현관문을 열었고, 보았다.

 하늘에는 크고 꽉 찬 달이 떠 있었지만, 밖에 선 그림자는 밝은 달빛을 모조리 먹어치우는 것 같았다. 러스티의 짖는 소리가 어째서 시원찮았는지 알 만 했다. 러스티도 겁을 먹은 것이다. 이 크고 강하고 무서운 손님에게.

 마사는 스크린도어 안에 우두커니 선 채로, 바깥 포치에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배트맨의 거대한 실루엣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땀과 흙의 냄새가 물씬 풍겼고, 배트맨의 길고 무거워 보이는 망토에는 진흙이 엉겨붙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는 만만치 않게 커다란 짐이 걸쳐져 있었다. 진짜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배트맨이 둘러메고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가려진 데다 축 늘어져 바닥을 향한 얼굴은 마사의 위치에선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클락 켄트였다. 마사가 눈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보냈던 그 날의 클락이다. 입고 있는 옷도 마사의 가슴에 칼로 새기듯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 날의 바로 그 옷이었다.

 저 달빛 좀 봐.

 일반 상식으로 볼 때, 몰래 남의 무덤을 파기에는 좋지 않은 밤이다.

 하기야 이 커다란 박쥐 남자는 상식이니 법이니 하는 것을 그렇게 열심히 지키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밤중에 자기 관할 구역에서 비행기로 다섯 시간쯤 떨어진 스몰빌까지 찾아와 남의 무덤을 파낼 줄이야. 게다가 주인 앞에 죽은 새를 물어다 놓은 고양이처럼, 검은 가면 뒤의 눈이 칭찬을 바라기라도 하듯 반짝이는 건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안녕하세요, 켄트 부인."

 배트맨은 헐떡였다. 유일하게 드러난 입가와 뺨에 길게 생채기가 나 있었다. 손톱 자국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마사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은 것인지, 배트맨의 입술이 안심시키려는 듯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안심시키는' 것은 원래 배트맨의 특기가 아닐 것이다. 어색할 수밖에. 그래도 배트맨은 마사를 만날 때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색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아드님 친구입니다."

 이것도 언젠가 들었던 말이로군. 마사가 여전히 다음 행동을 정하지 못하고 굳은 채 쳐다보는 동안, 축 늘어져 있던 클락의 몸이 배트맨의 어깨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트맨은 재빨리 그를 고쳐 짊어졌다.

 그 순간 클락이 움찔하면서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냈다. 마사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제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었다.

 클락이 신음 소리를 냈다고. 즉 숨을 쉬고 있다고. 게다가 아픈 걸 느낀다고. 마사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니, 새하얘진 것인가. 정신이 아득해진 것인지, 아니면 번쩍 정신이 든 것인지, 마사는 갈팡질팡이었다. 마사의 심장이 부서질 듯이 쿵쾅거리고 있는데, 클락은 심지어 불평까지 했다. 헛소리처럼 우물거리며 신경질적으로 항의하는 미약한 소리로 미루어 보아 별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틀림없는 클락의 목소리였다.

 "아프다고."

 갈고리같이 세워진 클락의 손톱이 배트맨의 팔을 콱 파고들었고, 총알도 막아내는 수트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은 이를 악물었다.

 "아드님 엄살이 정말 심하네요."

 마사는 비로소 배트맨의 얼굴에 난 할퀸 자국도 죽은(?) 아들의 소행임을 짐작했다.

 "제발 부탁이니 켄트 부인, 부인은 기절하지 말아주세요. 제정신이 아닌 건 아드님만으로도 벅찹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문 좀 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배트맨은 모양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중하게 말했다. 무시무시한 박쥐 옷을 입지 않고 있을 때의 이 남자가 어떤 얼굴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마사는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평소에는 생각보다 신사일지도.

 마사는 턱을 치켜들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는 클락의 엄마예요. 많은 걸 보고 겪었다고. 겨우 이 정도 일로 기절할 거라고 보다니, 모욕적이네요."

 마사의 목소리에는 아주 오랜만에 그녀 특유의 생기와 재치가 돌아와 있었다. 마사가 기꺼이 활짝 열어젖힌 스크린도어 너머에서 배트맨은 빙긋 웃었다. 이번에는 그리 어색해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20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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