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튀긴 팝콘이 담긴 커다란 플라스틱 그릇을 안고 로이스가 돌아왔을 때, 아주 먼 곳에서 온 손님은 어둑어둑한 로이스의 거실에 느긋하게 앉아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면에서 너울너울 흘러나온 빛이 공간을 부옇게 채우고 그의 옆얼굴에 더욱 극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이 세상의 기준에 어긋남이 없도록 아름다운 얼굴에 말이지.

 "데들리스트 캐치."

 클락 켄트는 화면에 막 떠오른 방송 프로그램 제목을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읽었다. 반은 슈퍼맨 같고, 반은 데일리 플래닛의 신입 기자 같은 목소리였다. 위풍당당한 슈퍼맨과 매사 서투른 리포터의 중간 어디쯤. 그것이 완전히 경계를 풀었을 때의 진짜 클락 켄트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 그 모습을 아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지. 이 몸이 그 중 하나라 이거야. 로이스는 흡족해하며 클락의 곁에 바싹 앉았다. 클락이 부드러운 눈으로 로이스와 눈을 맞추었다.

 "로이스, 이 다큐멘터리 좋아해요?"

 "꽤 재미있죠. 내가 아는 사람이 저 바다에서 일한 적 있었다는 걸 알게 된 후엔 개인적인 흥미도 생겼고."

 로이스는 눈썹을 찡긋거렸고, 클락은 씩 웃었다.

 "TV로 보는 게 훨씬 낫겠죠. 집에 앉아서 구경하면 목숨도 위험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냄새가 안 나니까요. 로이스도 그 생선 냄새를 한 번 맡아 봐야 하는데요."

 클락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고, 화면 속에 펼쳐지는 낯익은 바다와 배들을 보자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비린내가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별로 기분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클락의 콧등에 잠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로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하필 게잡이였어요?"

 "돈 많이 주니까?"

 클락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도 로이스도 그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클락은 게잡이 시즌 마감 직전까지 일하고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돈을 받기 전에 슈퍼맨이 필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때는 아직 누구도 그를 슈퍼맨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름이 없었어도, 슈퍼 수트를 입지 않았어도 클락 켄트는 슈퍼맨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잠시동안 만들었던 친분과 직업, 때론 그보다 더한 것들을 버려야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나서는 것. 장엄한 붉은 망토나 자랑스럽게 가슴에 새긴 S가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야말로 슈퍼맨의 본질이었으니까. 그것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항상 클락 안에 있었다.

 베링해의 게잡이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으로 꼽힌다. 얼마나 위험하고 사건사고가 많은지 디스커버리 채널이 여러 시즌의 장편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스릴을 세계 만방에 방송하기에 이르렀다.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위험한 직업. 한번 시도해 볼 이유로 충분했지.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나름의 아름다움도 있고요. 위도가 높고 주위에 빛이 없는 바다에서 본 밤하늘은 정말로 특별했죠. 하지만... 그 냄새만은 못 참겠더라고요."

 클락은 신참이었기 때문에 주로 미끼 손질을 도맡아 했다. 죽은 지 석 달은 된 큼직한 물고기를 조각내는 일이다. 꽝꽝 얼어 있던 생선은 징그럽고 차갑고 딱딱했다. 그래도 언 상태가 낫지, 녹기 시작하면 지독한 냄새가 클락의 예민한 후세포를 죽어라고 찔러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크립톤인도 지구인들처럼 모든 감각 중에 후각이 가장 빨리 피곤해진다는 사실이다.

 클락은 일을 시작한 첫날, 완전히 언 상태의 미끼를 조각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얼마나 얼었느냐면 물고기들이 담겨있던 박스 모양 그대로 수십마리가 한데 뭉쳐서 커다란 사각형 얼음 덩어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클락은 침착하게 칼을 휘둘러서 차근차근 돌덩이 같은 생선들을 잘랐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서 이러다 잘못하면 도마까지 써는 게 아닌가 약간 걱정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적당하다 싶은 수준으로 속도를 조절해서 두 시간 반 만에 미끼 손질을 마쳤다고 보고했을 때, 선원들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둥그렇게 둘러서서 곱게 다듬어진 미끼 더미를 쳐다보았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땐 다들 냄새 때문에 얼굴이 시퍼래진 줄 알았지.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심하게 언 상태의 고기는 자를 수 없는 게 맞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미끼용 절단기도 있던데 그날 나한텐 일부러 이 빠진 칼만 준 거예요. 제대로 못 자르고 놀림을 당했어야 하는 건데, 그게 일종의 신고식인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다 망쳐버렸던 거죠. 난 일이 원래 그런 줄로만 알고 열심히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다 잘라서......"

 로이스는 웃느라고 안고 있던 그릇을 크게 흔들었고, 안에 들었던 팝콘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마음만 먹으면 그 모든 팝콘을 중간에 잡아챌 수도 있었겠지만, 클락은 그냥 내버려 뒀다. 그걸 잡으려면 어느새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로이스를 떼어놔야 하는데, 그러긴 싫으니까.

 "그 때 분위기 정말 어색했어요. 그래도 다행히 아주 이상한 괴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신참이 군기가 바싹 들었나보다 하고 좋게 생각하더라고요. 다음 날은 몸살이 난 척 비실비실 일했는데 당연하다고 여겼는지 봐 주더군요... 아, 데비 수."

 클락이 화면에 잡힌 게잡이 배를 보고 반가워했다.

 "저게 내가 탔던 배예요."

 "나도 알아요."

 로이스는 빙긋 웃었다.

 "선장님이 무척 무뚝뚝하시던데. 그래도 좋은 분 같았어요. 우리 둘이 클락 얘기를 많이 했죠."

 "이 스토커."

 클락이 웃으니 기대고 있던 로이스도 같이 흔들렸다.

 "저 선장님이 클락에 대해 제일 뚜렷하게 기억하는 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손이에요."

 "손?"

 클락이 손을 내밀어 펼쳐보였다. 다른 행성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손가락이 여섯 개도 아니고 비늘이 달리지도 않고 손톱이 무시무시하게 길지도 않았다. 너무 크거나 너무 작지도, 너무 울퉁불퉁하지도 않다. 관절 숫자도 지구인과 똑같다. 초록색도 붉은색도 아니고 옅은 크림색이다. 로이스는 그 손을 잡았다.

 "너무 부드럽고 보송보송하잖아요. 굳은살 한 점 없고. '그런 팔자 늘어진 손을 가진 남자는 믿을 수 없지!'"

 로이스가 데비 수 선장의 억센 말투를 흉내냈다.

 "난 굳은살 같은 건 안 생겨요. 생길 수가 없나 봐요."

 클락은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배 타려고 면접 볼 때, 이런 손 가지고 대체 무슨 일을 하겠냐고 묻더군요. 내 손이 어지간히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에요."

 "난 맘에 드는데."

 로이스가 클락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때 TV 화면이 급격히 바뀌더니 활활 불타는 오일 리그가 등장했다. 클락에겐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오일 리그였다. 로이스도 클락의 표정이 변한 것을 보고는, 여전히 클락의 손을 잡은 채 다시 화면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녀도 이 사건을 익히 알고 있다. 어쩌면 클락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클락은 후일담을 모르지.

 "불타는 천사라고 들어 봤어요?"

 "뭔데요?"

 되물으면서도 클락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날 오일 리그에서 아홉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클락은 최선을 다해서 보이는대로 사람들을 구해냈지만, 그라고 해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 낼 수는 없었다. 슈퍼맨이라고 해도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는 없다. 무소부재는 그로서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완전한 신의 영역이었다.

 "더치 하버에 새로 생긴 전설 같은 거예요. 오일 리그가 폭발하던 날, 불꽃으로 몸을 둘러싼 천사가 내려와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을 구해주고 헬리콥터도 구해 준 다음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죠."

 "아아."

 무슨 이야기인지 그제야 알아차린 클락이 뺨을 붉혔다.

 "그 때, 중간에 기름을 뒤집어써서 몸에 불이 붙었어요. 불을 끄려면 끌 수도 있었을 텐데, 옷이 이미 타버린 후여서... "

 그래서 클락은 슈퍼 수트의 존재에 엄청나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의 몸만큼이나 내구성이 좋은, 지구에서는 만들 수 없는 옷이다. 그게 없던 시절의 클락은 정말이지 옷을 자주 잃어버렸다. 찢어지고 불타고 때론 거의 증발해버릴 때도 있었다.

 "옷이 타서 없어졌는데 불도 없으면 모양이 더 이상할 것 같았어요."

 과연. 알몸의 천사보다야 불타는 천사가 낫겠네. 로이스는 키들거리느라 거의 듣고 있지 않았지만, TV에서는 그 날 생업을 걷어치우고 달려나간 게잡이 배들이 오일 리그 구조에 큰 역할을 했다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게잡이 배에서 있었던 희생이 막 언급되는 중이다.

 바닷바람에 거칠어진 얼굴에 며칠이나 안 깎은 수염이 돋은 데비 수의 선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구조 요청을 들은 데비 수가 급하게 배 방향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리는 바람에 신출내기 선원 한 명이 바다에 떨어져 실종되었다는 것이었다. 로이스의 곁에서, 문제의 실종된 선원 본인이 '아' 하고 화면 속 선장을 알아본 표시를 했다.

 -이 일이 이십년째지만 내 선원을 잃은 건 그 때가 처음이었소.

 인상을 찌푸린 채 걸걸한 목소리로 선장이 말했다.

 -처음부터 감이 안 좋았어요. 어쩐지 불안하더라고.

 무사히 살아 있다고 소식이라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선장의 목소리에서 짙은 후회를 읽은 클락은 속으로 미안해했다.

 -사람이 일은 참 열심히 하고 착했는데 이상하게 여기 속하지 않은 느낌이었어. 어디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죠. 아마도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나 봐요. 그 친구를 태우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가만히 끝까지 선장의 말을 들은 클락이 뜻모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봐요, 다들 알더라고요. 나를 보면 모두가 본능적으로 눈치 채더군요."

 "뭘요?"

 "내가 여기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는 거요."

 "클락."

 진심일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로이스는 걱정스런 얼굴로 클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로이스는 클락이 조나단 켄트의 무덤 앞에서 보여주었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우주적 규모의 미아 같은 얼굴이었지. 단순하게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어디에도 아예 돌아갈 곳이 없다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어. 클락은 그 때도 조금도 품위를 잃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로이스는 그 이면의 애원을 들었다. 이 곳에서마저 쫓겨나게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총으로 위협당해도 기삿거리를 놓치는 법이 없던 로이스 레인으로 하여금 세기의 특종을 기꺼이 포기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그 갈 곳 잃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걸 바꾸고 있어요, 로이스."

 그러나 이제 클락의 눈에는 그전만큼 쓰디쓴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지금 이 순간에도 바뀌고 있어요."

 클락은 속삭였다. 어머나. 걸리적거리는 팝콘 그릇을 얼른 옆으로 치워버린 로이스는 클락의 반짝거리는 눈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이 외계인 말하는 거 봐.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무슨 기분이 드는지 알고 저러는 건지. 얄밉기도 해라.

 하지만 뭐 어때. 못이기는 척 좀 넘어가 주면 어떻단 말인가. 클락이 행복해하고, 나도 행복한데. 지난번에 클락을 목숨 걸고 믿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났지? 그래서 우리는 지구를 구했잖아. 앞으로는 또 무슨 기적이 펼쳐질지 누가 알아. 난 궁금하다고.

 로이스는 보드라운, 그러나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해 낸 클락의 손에 슬며시 깍지를 끼었다. 때로는 아무 보장이 없어도 기꺼이 목숨을 걸 만한 일들이 있다.

 그리고 로이스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2014.5)





아주 오래 전 맨오브스틸 시절에 썼던 클로이스 연성을 약간 다듬어서 올립니다.

맨오브스틸 후 뱃대숲 개봉 전에 한 연성들 보면 제가 얼마나 간절히 클락과 로이스 앞길에 꽃길이 펼쳐지길 바랐는지 알 수 있네요 (피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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