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 카비젤(몬테 크리스토 역), 가이 피어스(페르낭 몽데고 역) 주연 몬테 크리스토(2002)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서 헨리 카빌은 15-16세의 알베르 몽데고 역이었는데... 영화 중 결정적인 장면에서 메르세데스가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네요.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알베르 몽데고의 꾹 다물어진 입술은 결연했고, 교범에 나오는 그대로 훌륭한 방어 자세를 취한 몸은 꼿꼿했다. 그러나 커다란 눈에는 완전히 숨기지 못한 두려움이, 앳된 얼굴에는 실전은 생전 처음임을 드러내는 긴장이 가득하다.


전에 없이 냉정한 기분으로 그 얼굴을, 아, 이런 순간에도 소름끼칠 만큼 메르세데스를 꼭 닮은 고운 얼굴을 관찰하던 백작은 시험삼아 맞닿은 칼끝을 슬쩍 밀어보았다. 그러자 소년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두 개의 칼을 타고 고스란히 백작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백작은 그토록 꿈에 그리던 복수가 목전에 다가온 상황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제 아비를 지키겠답시고 어린 알베르가 끼어들 것까지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일을 망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소한 장애에 불과했다.

이미 백작의 칼에 여러 군데의 자잘한 부상을 입은 페르낭 몽데고는 상처를 핥는 늙은 여우처럼 폐허의 구석에 주저앉은 채 뜻모를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들의 뒷모습과 냉정한 백작의 얼굴을 바쁘게 오가며 관찰하는 눈은 오랫동안 과용한 독한 포도주와 불규칙적인 생활의 결과로 흐리멍덩했다. 백작은 그 증오스러운 얼굴로부터 시선을 돌려, 이런 순간마저 너무 맑아서 마치 공정한 판관처럼 보이는 알베르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 아버지와 나 사이엔 네가 모르는,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단다."

소년이 비켜 주기를 바라면서 백작은 칼날을 슬쩍 부딪쳤다. 어미개가 까부는 새끼의 주둥이를 아프지 않게 무는 시늉을 하듯이 무해한 경고였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알베르는 거의 신경질적으로 칼을 떨어내고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모르는 게 많을 지 몰라도, 당신이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는 건 알아요."

알베르는 벽에 처박혀 주저앉은 제 아버지 페르낭을 등지고, 페르낭과 백작 사이에 서 있다. 어떻게든 백작의 칼로부터 아버지를 보호하겠다는 의지였다. 그 뒤에서 페르낭이 슬며시 입가를 끌어올리는 것이 보였다. 어린 아들이 기특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답게도 또다른 교활한 무언가를 획책하는 것인지.

네가 그 아이를 찌르지 못한다는 걸 안다는 비웃음으로 해석한 백작은 입술을 물었다. 페르낭은 예전부터 사람의 감정과 약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 능했다.

"그건 반드시 막을 겁니다."

알베르는 착한 아이였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백작조차 그렇게 믿고 따랐으니, 제 아버지는 오죽하랴. 눈앞에서 아버지를 해치려는 시도가 있는데 그걸 보고만 있을 리가 없다. 하루 낮과 밤을 온전히 들여 그들 사이의 긴 역사와 원한을 설명한다 해도 물러날 리가 없었다.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몽 당테스라는 이름 대신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작위를 쓰며 몽데고 일가와 교유를 시작한 이래, 그는 철저히 계산된 행동으로 이 일가족을 대했다. 아이를 함정에 빠뜨린 후 거짓으로 유괴범들의 손아귀에서 구해냈고, 거짓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호의를 가장했다. 그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려오는 메르세데스에게는 다시 없이 매정하게 대했다. 더 이상 연인이 아니라 복수자로서.

그럼에도 백작은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게, 진실로 이 소년을 귀여워하게 되고 말았다. 온실 속에서 부족함 없이 화초처럼 자라 누군가에게 악의를 품은 적도, 악의를 받아 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웃음과 기쁨, 온기와 밝음, 에드몽 당테스가 오랜 세월 동안 빼앗겼던 모든 그립고 아름다운 것들, 인생을 풍요롭고 달콤하게 하는 온갖 것들을 곱게 뭉쳐 만든 것 같은 아이였다. 당테스가 돌로 된 무덤에서 천천히 썩어가는 동안 원수들은 이런 아이를 낳아 기르며 인생을 즐겼다.

더욱 분노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증오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얼마나 저항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던지, 이프 성의 찬 돌벽 안에서 오랫동안 단련된 백작의 굳은 심장조차 녹이고 말았던 것이었다.

어째서 제 아비 같지 않을까. 어째서 이다지도 다정하고 순진한 것일까. 제 아비를 닮았더라면 복수가 훨씬 수월했을 터인데. 백작은 수십 수백 번이나 했던 생각을 다시 끄집어내어 쓰게 곱씹었다.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알베르가 고마움이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잡아 왔을 때였을까. 철저히 계획된 구출 작전이었음에도, 그 감사로 반짝이는 눈을 보았을 때, 백작은 자기가 정말로 이 어린아이를 위험으로부터 구해낸 것 같은 뿌듯한 만족감에 물들었다.

또는 오지랖 넓게 아이의 열여섯번째 생일에 아비 노릇을 대신했을 때였는지도 몰랐다. 아이가 청년이 되는 순간을 축하하는 그 자리를, 페르낭은 대수롭지 않게 비웠다. 소년의 기대에 찬 눈에 짙은 실망이 스치는 순간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비어 있는 아비의 자리를 채우고 되도 않는 연설을 했다. 고난과 사내다움에 대한 즉흥적인 몇 마디였는데, 소년은 그것에조차 감동을 받은 나머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백작에게 미소를 보냈다.

백작의 연극은 아이를 쉽게 홀렸지만, 동시에 너무나 진짜처럼 즐거웠던 나머지 백작 자신도 꼼짝없이 아이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알베르는 너무도 쉽게 너무도 순수한 신뢰와 감사를 백작에게 선사했고, 그것은 백작의 복수심을 삭이는 독이었다. 감옥 속에서 잃어버린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양심이 굳어버린 심장 구석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독이었다. 알베르를 볼 때마다 백작은 약해졌고, 가책을 느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계산 착오였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아이는 배신자들 사이에서 난 배신의 씨앗이었다. 복수를 위한 제물이다. 친구의 등을 찌른 자의 아들이며, 변절한 연인의 아들이다. 이 아이가 아무리 결백하고 죄 없다 해도, 이 아이의 살과 피가 모두 에드몽 당테스의 고통과 눈물에 기인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이 아이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이프 성에서의 긴 세월 동안, 한때는 알베르의 것만큼이나 붉고 말랑거렸던 백작의 심장은 이제 돌처럼 찬 회색의 단단한 덩어리로 변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원수의 씨를 사랑할 리는 더욱 없었다. 뱀의 자식은 아무리 어여뻐도 뱀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키지 않는다면 너를 죽여야 한다."

백작은 느릿느릿 말했다. 그 간단한 말을 하는데도 칼을 삼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입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자 그 말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이것이 옳다. 그는 이 일을 할 당연한 권리를 가졌다.

"Do your worst."

알베르는 제법 각오한 태도로 말했다. 해 볼테면 해 봐. 전에도 백작은 알베르의 입에서 나오는 이런 맹랑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러 달 전, 칼을 들고 둘러선 납치범들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뱉은 그 말이 알베르 몽데고의 자기 소개였다.

아직 세상이 너에게 얼마나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는지 꿈에도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하는 말이겠지. 아가,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란다. 네가 과연 네게 벌어질 수 있는 "나쁜" 일에 대해 뭘 알고 있겠니?

마음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을 삼키며, 백작은 움직였다. 가만히 서서 감상에나 젖었다간 복수는 요원할 것이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고, 더는 잡념을 허락할 수 없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은 속도와 힘으로 연이어 공격하자, 소년의 자세는 쉽게 흐트러졌다.

각오의 말과 달리 알베르의 검에는 독기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취미와 운동삼아 멋을 부리며 배운 것에 불과했다. 어쩌다 정말 상대방을 상처 입힐 만한 공격을 할 때는 반드시 최후의 순간에 멈칫했다. 딱한 일이었다.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야코포가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백작님의 복수는 그 아이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훼방을 놓고 있잖나."

주제넘은 하인과 알베르에게 동시에 핀잔을 주면서, 백작은 날카롭게 칼을 그었다. 소년의 가슴 부분 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알베르가 훌쩍 물러서서 놀란 새끼 사슴 같은 눈으로 백작을 보았다. 그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칼을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여전히. 이런 꼴을 당하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백작이 자기에게 보여준 거라곤 거짓 뿐임을 깨달았는데도.

대체 무얼 보고 너는 나를 그렇게 믿는 게냐. 제발 그러지 말아다오. 그런 호소가 목구멍까지 치미는 것을 참느라 백작도 칼을 잠깐 쉬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머리를 식히려던 백작은 아들과 원수의 결투를 보고 있던 페르낭의 왼쪽 입가가 가볍게 경련하는 것을, 그가 무언가를 고대하듯 야비하게 입술을 핥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양이 백작의 마음에 더욱 동요를 일으켰다.

과거에 에드몽 당테스는 페르낭의 그런 표정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카드놀이를 하다 결정적인 패를 잡았을 때, 또는 경마에서 자기의 말이 선두로 치고 올랐을 때 페르낭 몽데고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입술을 핥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기 아들이 밀리고 있는데, 어째서?

"이번엔 옷을 찢었을 뿐이지만 네 운은 이게 끝이야. 너는 내 상대가 못 된다. 비켜라."

알베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셨어요? 왜 날 납치하고 구하는 척을 했어요?"

감정이 풍부한 소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당신을 믿었는데. 당신을 존경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황폐했던 가슴이 간질거렸다. 아주 낯선 기분이었고 조금 고통스러운 느낌도 들었지만, 죄 없이 이프 성채에 갇혀 있었던 십수년간 익숙해진 그 악독한 종류의 고통과는 달랐다. 그 너머에 무언가 부드럽고 따뜻한 것을 숨기고 있는 듯한 샐쭉한 아픔이었다. 며칠 전 메르세데스가 그의 마차 안에 숨어들어 변함 없는 마음을 토로했을 때 느꼈던 그런 아픔이었다. 생소하고 두려워서 내쳐버렸지만 그 날 밤 자리에 누워 몇 번이고 되새겼던 그 묘한 아픔이었다. 처음 느끼는 것이라서 낯설다기보다는, 예전에는 분명 알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종류의 아픔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면 분명 그 이름이 기억날 듯도 하여, 백작은 잠시 침묵했다. 알베르도 백작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슬픔과 기대감과 호소가 뒤섞인 눈으로 백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은 입을 열었다.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페르낭이 끼어들었다.

"그 개자식이 널 미끼로 네 어미를 노리니까 그랬겠지."

페르낭의 비웃음 실린 말이 찬물을 끼얹었다. 아니, 오히려 불을 질렀다. 백작은 막 손에 잡힐 듯하던 애매한 감정을 잊고, 지난 15년 동안 몸에 익어 익숙한 분노에 휩싸여 크게 칼을 휘두르며 발을 내딛었다.

"그런 거짓말을!"

깜짝 놀란 알베르가 황급히 팔을 들어 아버지에게 향하는 백작의 빠른 검을 막으려 했다. 그럴 생각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발이 엉킨 소년은 제 몸을 검로에 던지다시피 했다. 알베르의 칼이 백작의 검을 받아 흘렸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되돌릴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백작은 그것을 알았다. 목덜미가 서늘해진 백작은 칼을 치우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것이 신경을 타고 움직임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백작의 검이 부드러운 살을 쉽게 꿰뚫었다. 거의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수월하고 매끄럽게. 어긋난 검은 소년의 몸을 뚫는 순간 부러졌다.

알베르는 놀람과 고통 때문에 헉 숨을 들이켰다.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싸움의 흥분 때문에 고통을 덜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벌써 힘이 풀린 알베르의 발이 바닥을 헛딛고, 아직도 한참 더 자라야 할 몸이 무릎을 꺾으며 앞으로 휘청거렸다. 백작은 끝이 부러진 칼을 놓친 것도 모른 채, 알베르의 양 어깨를 잡았다.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소용없는 일이었다.

알베르는 힘이 빠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백작은 양 팔을 벌려 알베르를 받아 안았다. 알베르의 무게가 모조리 백작의 품 안으로 쏟아졌고, 백작은 그 몸을 고스란히 받아 함께 주저앉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년의 부드러운 고수머리가 백작의 목과 어깨에 닿았다. 길게 내쉬는 고통스러운 한숨 소리가 백작의 귀에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핏기가 어린 숨이었다. 소년을 고쳐 안아 바닥에 눕히고 그 머리를 한 팔 위에 되도록 편안하도록 얹은 백작은 겁에 질린 앳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알베르."

백작이 이름을 부르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알베르는 눈을 깜빡였다. 그저 놀란 얼굴이었다.

"나를 봐. 알베르."

알베르는 백작과 눈을 마주쳤다. 백작은 알베르를 위해서, 어쩌면 자기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눈을 돌려 알베르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부러진 칼끝이 비죽이 튀어나와 있고, 깨끗한 흰 셔츠 위로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백작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바닥을 더듬어 놓친 검을 찾아들었다.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아야 했다. 제발, 주여.

칼은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다. 얕지 않다. 상처는 충분히 깊을 것이었다. 무엇을 위해 충분히인가? 백작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턱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매던 백작의 눈이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페르낭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백작이 페르낭의 얼굴에서 읽은 것은 걱정도 슬픔도 고통도 아니었다. 백작의 등골에 소름이 쭉 끼쳤다. 이프 성, 살아 나온 사람이 없다는 그 잔혹한 감옥으로 가게 되리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느낀 것과 같은.

페르낭 몽데고의 눈에 비친 것은 통렬한 비웃음이었다. 세상 어느 아비가 제 자식이 칼에 찔리는 것을 보면서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면 안 됩니다."

백작은 페르낭의 얼굴에 떠오른 악마 같은 비웃음에 사로잡힌 나머지,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달려와 걱정스레 알베르를 내려다보던 야코포가 뭐라 말하고 있는 것조차 놓쳤다. 그래도 그가 뭐라 말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한 백작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칼을 뽑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출혈이 더 할 테니까.

"나도 알고 있네."

대답이라기보다 웅얼거리는 신음 소리에 가까웠고, 야코포는 완전히 멍해 있는 것 같은 백작을 대신해 열심히 생각했다. 날을 뽑지 말고 바로 외과의에게 보여야 했다. 젠장, 이곳은 파리 외곽이다. 훌륭한 의사에게 데려가려면 마구 흔들리는 마차에 태워 한 시간 가까이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아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애초에 여기는 마차도 없었다. 그럼 그냥 말에 태워서? 그걸 버틸 수 있을까? 모두 부정적이었다.

백작은 알베르의 시시각각 창백해지는 뺨을 건드렸다. 그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다친 것은 알베르인데 백작의 돌인 줄 알았던 심장이 사방으로 금이 갔다.

"이러고 싶지 않았...... 괜찮을 거다. 너는 괜찮을 거야."

알베르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어렵게 돌려,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페르낭 쪽을 보았다. 손이 제 아비 쪽으로 힘없이 내밀어졌다. 거기에 답해서, 페르낭은 보란 듯이 천천히 혀를 찼다.

"질 줄 알았어. 너는 언제나 실망스러웠으니까. 뭐든 제대로 하는 게 없었지."

백작은 귀를 의심했다. 이번에야말로 누군가 백작의 목을 양 손으로 단단히 틀어쥐고 숨통을 막아버리는 것 같았다. 이 순간에 그렇게 아이에게 가혹하게 굴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그저 순수하게 남을 괴롭히는 데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세상의 쓴맛을 볼 만큼 본 백작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니, 이 설탕과 꿀로 만든 과자 같은 아이가 그 악의를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말에 알베르는 조금 입술을 벌렸지만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처보다 소위 아비라는 자의 그 말이 소년에게 훨씬 큰 고통을 주었다는 게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백작은 분노가 끓어오른 덕분에 충격을 받아 멍했던 상태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네가 인간인가? 너를 지키겠다고 칼을 맞은 어린 아들에게 할 소리야?"

"누가 내 아들이야?"

페르낭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심지어 백작의 말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받아쳤다. 뜻을 알 수 없는 매정한 소리였다. 그 말을 뱉는 페르낭의 왼쪽 입가 경련이 심해졌다. 혀가 입술을 핥았다. 눈이 음습한 기대감에 젖어 번들거렸다. 더 이상 물어서는 안 돼. 저 자가 바라는 게 바로 그 질문이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 자는 질문을 원하고 있다. 그게 에드몽 당테스에 대한 기막힌 일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지?"

페르낭의 교활한 얼굴에 희열이 어렸다. 그보다 더 빠를 수 없을 정도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잡종개는 내 새끼가 아니야. 메르세데스, 그 계집이 나를 멋지게 속였지. 글쎄 나에게 시집올 때 벌써 저 더러운 걸 배고 있었다더라구. 너야말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일이겠지만."

목이 졸린 듯한 신음 소리가 났다. 내내 지켜보고 있던 야코포가 낸 길고도 끔찍한 신음이었다. 야코포조차도 그 말에 깃든 무언가 무서운 의미를 단번에 깨달았는데, 백작은 이상하게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뭐라고?"

어쩐지 멍청해진 백작을 대신해서 야코포가 움직였다. 절대 끼어들지 마라, 복수는 내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설령 내가 죽더라도 모든 것은 온전히 내 것이니, 끼어들지 마라. 백작의 명령은 그랬지만, 야코포는 백작의 사람이기는 해도 백작의 노예는 아니었다. 무엇이 백작에게 좋은 것인지 그에게도 판단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황급히  다친 소년 곁에 무릎을 꿇고는 지금까지보다도 천 배는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년의 낯을 살폈다. 정신 차리게. 사내답게 버텨, 젊은이. 별 거 아니야.

백작의 귀에, 야코포의 그 다정한 속삭임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베르의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아주 조용했다.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

"네 새끼라고. 아들이 생긴 걸 축하해. 곧 죽겠지만."

아득했다. 교활한 거짓말이야. 백작의 마음 한구석이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다른 한구석은 이미 체념하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알베르는 열여섯번째 생일이 지나고 2주가 되었다. 에드몽 당테스는 이프 성에 갇혀 있었던 기간을 단 하루도 빼지 않고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하루하루를 기억했던 집요함의 아주 일부분만이라도 동원하여 알베르의 생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면 금세 계산해 냈을 것이다. 알고 있었잖아.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다만 눈을 감고 보려 하지 않았을 뿐이지.

야코포는 백작의 입에서 나온 짐승 같은 신음 소리 때문에 어깨를 흠칫했다. 가물거리던 알베르도 눈을 번쩍 떴다. 백작은 지금까지 강철같은 의지로 계획에 따라 행하던 이성을 기꺼이 내버렸다. 그는 알고 있는 모든 저주를 페르낭을 향해 퍼부었다. 팔에 알베르가 안겨 있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페르낭의 목을 두 손으로 직접 졸랐을 것이다.

"죽여 버릴 테다. 내 손으로 반드시.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안돼요."

알베르가 속삭였다.

"죽이면 안 돼."

백작은 입을 다물고 알베르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의 안에서 무언가 변했다. 오랜 세월 동안 백작의 목표였던 것,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복수 따위가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한순간에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백작은 그 끈질긴 망령에게서 완전히 풀려나 진심으로 약속했다.

"죽이지 않아. 맹세하마."

페르낭을 향해 내밀어졌으나 그대로 흙바닥 위에 방치되었던 알베르의 손을 움켜쥐며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말했다.

"네가 정신을 놓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 약속을 지키면, 나도 저 자를 죽이지 않겠다."

마치 죽음과도 협상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듯이, 백작은 애원했다. 알베르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무 원망도 없는 무구한 눈이었다. 야코포는 그 어린 짐승 같은 눈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어째서 저 눈이 백작과 닮았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나. 백작의 어두운 눈에서 증오와 복수심을 제거하고 대신 밝은 빛을 채운다면, 꼭 저 눈과 같을 텐데. 복수로 눈이 어두운 백작이 알아보지 못했다면, 친구로서 대신 알아봤어야 했다. 야코포는 입맛이 썼다.

알베르는 속삭이듯 물었다.

"정말이에요?"

페르낭을 살려두겠다는 백작의 맹세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알베르는 좀 더 근본적인 답을 구하고 있다. 당신이 정말 내 친아버지인가요?

"그래. 그렇단다. 어쩌면......"

백작은 알베르의 손등에 뺨을 댔다.

"어쩌면 나도 처음부터 느꼈는지도 모르겠구나. 로마의 지하 무덤에서 네 눈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내가 복수심에 눈이 멀지만 않았어도 훨씬 일찍..."

알베르의 뺨 위에 물기가 떨어졌다. 백작은 그것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쳐내고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너를 볼 때마다 몇 번이고 생각했다."

알베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거의 수줍어 보이는 미소였다. 미소는 지워질 듯이 희미하고 뺨은 하얬다.

"나도 가끔... 백작님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와중에도 믿을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와서 백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너 같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저한테....."

야코포가 상처를 더 살펴보기 위해 건드리자 알베르는 눈썹을 찌푸렸다.

"제대로 설명을 해 주셔야 할 거예요."

"물론이지. 이야기를 해 주고말고."

백작은 알베르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아주 긴 이야기를 해 주마."

백작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낮게 속삭이며 알베르의 이마에 몇 번이고 입술을 눌렀다. 언제나 무신론자임을 내세우던 백작이었으나, 어쩐지 그 웅얼거림 속에 신의 이름이 섞인 것 같았다.

알베르는 이제 백작으로부터 다시 페르낭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리며 다시 한 번 그 쪽으로 내밀어졌다. 페르낭은 냉정한 눈으로 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페르낭이 내민 손에 덩굴손처럼 가볍게 와서 엉겨붙곤 하던 아주 작은 손가락이었다. 그것이 벌써 저렇게 컸다. 아버지를 지키겠다고 검을 잡을 만큼 자랐다. 그 손가락이 피에 젖어 있었다. 눈가가 시큰거려서 페르낭은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내 아들이 아니야."

페르낭은 스스로를 확신시키려는 듯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러나 방금 전의 비웃던 기세는 벌써 멀리 사라진 후였다. 알베르의 항상 발그레하던 뺨에서 핏기가 빠져나가 창백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견디기가 어려워서 페르낭은 시선을 돌렸다. 알베르가 아니라 백작의 얼굴을 봐야 한다. 얼마나 좌절스럽고 스스로가 미울까. 이번에야말로 돌아올 수 없는 절망 속으로 꺼지겠지. 이에 비하면 이프 성의 돌벽은 천사의 날개 같았을 것이다.

어렵게 알베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내 쳐다본 에드몽의 얼굴에선 정말로 얼핏 지옥의 일부가 보였다. 그 머릿속에서 얼마나 무서운 생각과 고뇌가 오가는지 환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헌데, 이상도 하지. 어째서 고소하지 않을까. 페르낭은 이상하게 침착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조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계획대로 되었는데, 저 자를 완전히 이겼는데. 제 손으로 제 지옥문을 열도록 했는데. 어쩐지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서 페르낭은 중얼거렸다.

"메르세데스가 고백했어... 미숙아를 낳았던 것이 아니라 혼전에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고.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니 내가 괴로울 이유가 없지. 저 놈이 다 가지는 꼴을 보느니... 너마저 저 놈에게 줄 수는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페르낭은 백작이 알베르의 몸을 끌어안고 지옥에서 올라오는 듯한 신음을 흘리는 소리를 들었다. 백작이 천천히 앞뒤로 몸을 흔들자 알베르의 몸도 흔들렸다. 소름끼치게 축 늘어진 알베르의 손이 흙바닥 위를 조금 스쳤다. 페르낭은 비로소, 거의 기다시피 해서 다가가 피와 흙먼지가 묻은 손을 잡았다. 차갑고 축축한 손이었다. 알베르의 손은 그동안 한 번도 이런 감촉인 적이 없었는데. 페르낭의 심장에서도 피가 빠져나갔다.

"알베르."

아버지, 하고 알베르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는 나지 않아도 어떤 목소리인지, 어떤 억양인지 페르낭은 알았다. 이 아이에게 수천 번을 그렇게 불리웠으니까. 아이가 처음으로 그 말을 정확하게 발음하던 날을 그는 아직도 기억했다.

페르낭의 이마가 천천히 떨구어져 알베르의 손에 닿았다. 도박빚으로 몇 대에 걸쳐 이어받은 영지를 팔았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마음을 찢어 놓았다. 끔찍한 후회였다.

"괜찮을 거다, 아가."

페르낭은 속삭였다.

"잔병 한 번 앓은 적이 없었지. 건강한 아이였어. 이 정도는 괜찮을 거다."

야코포는 소름이 끼쳐서, 횡설수설하는 페르낭을 쳐다보았다. 그 악마 같은 놈의 얼굴에 절절한 고통이 새겨져 있었다. 참으로 우습게도 서로를 원수로 여기는 두 사내의 얼굴 표정이 마치 거울에 비춘 듯 닮았다. 자식이 죽어가는 걸 보는 아비의 얼굴이었다.

야코포는 의사를 부르기 위해 그 끔찍한 장소를 뒤로 하고 뛰쳐나갔다. 의사를 찾아 데려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다. 야코포와 의사가 돌아왔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구원일까?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백작조차 탈출할 수 없는 절망일까.

야코포는 알 수 없었다.









 영화 몬테 크리스토(2002)는 원작 소설과 달리 헨리 카빌이 맡은 알베르 몽데고가 짐 카비젤이 연기한 에드몽 당테스의 친아들로 각색 되었습니다. (캐스팅을 봐도 어린 헨리 카빌은 가이 피어스를 정말이지 1도 닮지 않았고 짐 카비젤과는 그럭저럭 영화적 혈연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몬테 크리스토는 알베르를 복수를 위해 실컷 이용해 먹다가 정말로 죽일 뻔 합니다. 메르세데스가 제 때 와서 말리지 못했으면 정말 찔렀을 것이네요. 이 버전의 백작은 원작보다도 좀 더 너무한 면이 있고, 알베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감정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아이인 듯, 자기를 죽일 뻔하고 그 때까지 친부로 여겼던 양부를 죽인 백작을 마지막 장면에서도 잘 따릅니다.


 이 버전의 백작이 눈 먼 복수를 감행하다가 결과적으로 자기 눈 쑤시는 얘기를 쓰고 싶었는데, 알베르 죽이기 미안해서 끝은 그냥 열어놓았네요.


 네 제가 왤케 갑자기 설명이 늘어지느냐 하면 이 영화 본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어차피 영화도 안 보신 분이 이걸 읽었을 거 같지 않기는 하지만 그냥 노파심에... (쭈그렁)


행복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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