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한 발 밑으로 후다닥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로이스는 소스라쳤지만, 계단참을 밝히는 창이 오래되고 때가 끼어 햇빛이 온전히 들어오지 않는 탓에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굴러다니는 먼지덩어리 같은 게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라는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잿빛 털이 마구잡이로 엉켜 있고 꼬리가 긴 쥐일까? 다리가 여섯 달리고 번쩍이는 등딱지를 가진 바퀴벌레일까?


로이스가 몸서리를 치며 한 단 한 단 밟아 올라갈 때마다 계단이 긴 비명을 질렀다. 목을 졸리는 노파의 신음 같은 소리였다. 이 건물은 대체 준공연도가 언제야! 메트로폴리스에 이런 데가 있었다니. 고담도 아니고.


이 건물까지 오는 길도 엄청났다. 좁다란 길은 차도와 인도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데다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냄새나는 구정물이 곳곳에 고여 있었다. 긴가민가 끊임없이 의심스러워하며 골목의 골목으로 접어들자 허술한 출입구가 도둑놈처럼 슬그머니 나타났다.


침침한 안으로 들어서면, 벽에 우르르 달려 있는 우편함들이 있었다. 반쯤 떨어져서 비스듬히 늘어진 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변색이 되고 녹이 슬었다. 두 집씩 여섯 층, 열두 개의 우편함. 몇 집은 사는 사람이 없는지 아니면 여기 살고 있는 걸 감추고 싶어서인지 우편함에 적힌 이름이 지워지고 안에도 먼지 뿐이었다.


백 살을 넘긴 열두 쌍둥이처럼 생긴 이 우편함들 옆에는 만들어 단 지 오래지 않은 귀여운 나무함이 하나 더 있었다. 재질이며 산뜻한 파란 색깔이며, 너무 다르게 생겨서 이 건물과도 다른 우편함들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7층. KENT. 틀림없었다. 이 건물 7층에는 클락 켄트가 살았다.


물론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로이스는 계단이 무너질세라 한 층 한 층 조심스레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렇게 낡은 계단이 아침 저녁으로 키가 크고 덩치도 좋은 클락이 밟는 걸 버틸 수 있을까.


헐떡이며 끝까지 다 올라가서야, 로이스는 왜 7층이 원래 우편함조차 없었는지 알았다. 온전한 집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건물 유지를 위한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 같은 곳이었던 게 아닐까? 천년 전쯤 이 건물도 멀쩡하고 관리인이라는 것이 존재할 때의 이야기였겠지. 그러다가 얼마라도 세를 더 받으려고 불법 개조를 해서 세입자를 받은 것이겠다. 클락 켄트같이, 갓 시골에서 올라와서 돈이라곤 없고 순진해 빠진 세입자로.


로이스는 클락에게 받은 열쇠를 열쇠구멍에 집어넣으려다가 말았다. 문이 잠겨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독하게 아귀가 안 맞아서 닫힌 상태로도 문틈으로 집 안이 슬쩍 들여다보였다.


클락 켄트는 일상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인간적 기준의 조심성이라는 게 없었다. 사실 그런 게 필요 없기는 하지. 클락은 요리를 할 때 오븐 장갑도 필요 없다. 200도로 예열된 오븐을 열고 맨손으로 팬을 쑥 집어넣었다가 한 시간 후에 뜨겁게 달구어진 것을 역시 맨손으로 꺼냈다. 야채건 고기건 칼질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잘 하는데, 손가락을 실수로 내리치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려쳐도 별 상관이 없어서였다. 보시다시피 집 문도 잘 안 잠근다. 그가 보행 신호를 착실히 기다려서 초록불일 때만 건너는 건 자기한테 부딪친 차들이 박살날까봐서였다. 하여튼 클락 켄트의 신변을 걱정하는 것이야말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쓸데없는 짓이겠지만......


세상엔 소용없는 줄 뻔히 알아도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삐그덕거리는 뻑뻑한 문을 겨우 열고 들어서자, 다행히도 방금 전까지 보고 겪은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집 안은 깨끗했다. 기울어가는 저녁 햇빛이 맑게 닦인 창문으로 들어오는 걸 보니 숨통이 트인다. 침대와 옷장, 한쪽으로 기운 책상과 식탁만으로도 거의 꽉 찰 만큼 좁은데다 천장마저 많이 낮았지만.


바닥에는 제법 포근해 보이는 러그가 깔려 있고, 침대는 호텔 침대 못지않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주름 하나도 안 보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도 없었다. 깔끔해라! 하긴 데일리 플래닛에 있는 클락의 책상도 이렇게 단정했다. 모든 서류는 나름의 방식으로 A부터 Z까지 구분되어 착착 가지런히 꽂혔고, 연필꽂이에 든 연필들은 항상 적당하게 깎여 있다.


하지만 클락의 집은 추웠다. 하루 종일 주인이 없었으니 그렇겠지. 로이스는 일단 들고 온 것들을 식탁이든 바닥이든 알맞은 곳에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든 난방 스위치가 있을 텐데.


한참 찾다가 결국 포기한 로이스는 이번엔 화장실일 듯한 문을 열어 보았다. 절반만. 좁아서 양변기에 걸리는 바람에 문이 다 안 열리는 것이다. 역시 엄청나게 낡고 못생긴 화장실이었지만 여기도 깨끗했다. 수도꼭지를 올리자 물이 나왔다.

완전 얼음물이었다.

기겁한 로이스가 온수 쪽으로 힘껏 손잡이를 돌렸지만 소용없다. 기다려도 점점 더 차가워지기만 했다. 얼어버리지 않고 물이 나오는 것만 해도 감사할 지경이다. 로이스는 너무 차가워서 거품도 잘 안 나는 비누로 겨우 손을 문지르고 최대한 빨리 헹군 후 새빨개진 손을 수건에 닦았다.

손도 씻었겠다, 로이스는 가져온 2인분의 맛있는 음식들을 탁자위에 놓았다. 클락이 제일 좋아하는 가게에서 특별히 주문해 포장해 온 음식들이다. 잔뜩 안고 온 꽃들도 여기저기 장식하고. 이 모든 과정을 수행할 때도 집 안은 계속 추웠다.

클락은 준비가 끝난 알맞은 시간에 왔다. 정말 지금 온 건지, 아니면 왔는데도 일부러 밖에서 기다려 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로이스, 하고 클락이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고는 귀엽게 생긴 치열이 다 드러나는 커다랗고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들어섰다.

"생일 축하해요, 클락."


로이스가 터뜨린 작은 폭죽에서 색색깔의 예쁜 종이 리본이 튀어나왔지만, 천장이 너무 낮아서 보기 좋게 클락의 머리 위에 내려앉을 수가 없었다. 낮은 천장에 철퍽 부딪친 반짝이가 볼품없이 카펫 위로 떨어졌어도 클락은 그저 좋아서 생글생글 웃었다.

식탁에 앉은 클락은 오늘 다녀온 취재가 어땠는지, 얼마나 빨리 오고 싶었는지, 귀띔해 준 것도 아닌데 로이스가 클락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정확히 사 온 게 얼마나 신기한지 얘기했다. 로이스는 클락이 염불을 외든지 전화번호부를 읽든지 크게 상관없다는 기분으로 턱을 괴고 황홀하게 들었다.

웬만큼 재잘거린 클락이 어느 순간 말을 멈추더니 로이스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더니 그 얼굴에서 들뜬 기색이 폭삭 식는 게 똑똑히 보였다.

"로이스, 춥군요. 어떡하지. 이래서 계속 밖에서 만나자고 한 건데. 우리 집 너무 춥죠. 난 난방이 필요 없어서......"

클락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오늘 클락의 집에 가 보고 싶다고 강력 주장한 것은 로이스였다. '우리 집... 겸양을 하는 게 아니라 사전적 의미 그대로 누추한데요.' 클락은 심각하게 말렸다. 하지만 로이스가 결심한 걸 클락이 효과적으로 막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로이스는 힘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클락, 잊었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거긴 북극 근처였다구요. 2만년 동안 얼어 있던 우주선 안이었잖아요. 집 안이 아무리 추워봐야 그 때보다 추우려고. 그렇게 춥지 않아요."

로이스가 극구 부인해도 클락은 슬프게 한숨을 내쉬었다.

"춥잖아요, 피가 심장으로 몰린 게 보이는데. 말단부위가 얼음같이 차가울 거예요."

클락은 로이스의 손을 잡고 호호 불었다. 우리 로이스 추워서 어떡해. 클락은 기억이 닿는 한 딱 한 번, 추위라는 게 뭔지 느낀 적이 있었다. 블랙 제로 우주선에 끌려가서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였다. 딱딱한 실험대 같은 것에 꽁꽁 묶여 누워 있었는데, 살갗이 저절로 오그라드는 것 같고 뒷덜미가 뻣뻣하고 손끝 발끝이 차가워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로지 햇볕 쐬고 싶은 생각만 들고 정말 기분이 나빴다고. 로이스가 그런 상태인 건 싫어.

참, 술을 마시면 사람들은 몸이 더워진다고들 한다. 클락은 그런 걸 느껴 본 적이 없고, 사실은 몸이 따뜻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체온은 더 내려간다는 걸 알지만.

클락은 사 온 와인을 짜잔 꺼냈다. 코르크를 뽑고 잔 두 개에 따르는데 로이스가 어째 한참 말이 없다. 눈치를 보니 로이스는 와인 병에 붙은 라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뭔지 알아본 것이다. 역시 로이스는 모르는 게 없어. 클락은 약간 불안해진 와중에도 좀 뿌듯했다.

"이걸 어떻게 구했어요?"

"샀는데요......"

로이스의 목소리에 심상치않은 기운이 서린 걸 감지하고 약간 주눅든 클락이 대답했다.

"얼마 주고?"

클락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가격을 말했다. 좀 깎아서 말할까 싶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로이스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로이스는 아무 말도 안 했다. 하지만 예쁘게 그린 눈썹 사이가 잔뜩 좁아졌고,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클락의 얼굴을 떠나 집 안을 쓱 둘러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뻔히 짐작이 가능했다.

"난 정말 난방도 필요없고 좀 불편한 동네에 살아도 괜찮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거 알잖아요, 로이스. 하지만 와인은 로이스와 마실 건데. 같이 보내는 첫 생일인데요. 그래서."

"클락......"

클락 켄트는 생전 음식 투정이라는 걸 하는 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맛있는 걸 구별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클락은 잘 구별했다. 정말로, 엄청나게, 잘. 혓바닥도 슈퍼 혓바닥인가 보지. 와인 같은 건 냄새만 맡아도 얼마나 좋은지 나쁜지 세밀하게 알았다.

그래서 클락은 더욱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로이스와 특별한 날에 마실 와인이 질 나쁜 것을. 좀 더 좋은 거, 좀 더 좋은 거 하다가 그렇게까지 된 것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로이스는 차마 뭐라 할 수가 없어서 문제의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에이 젠장. 정말 맛은 되게 좋네.

"클락한테 난방이 필요없다는 것까진 이해해요. 하지만 집이 애초에 난방이 안 되는 건 또 다른 문젠데. 난방 스위치를 못 찾겠던데 설마."

클락은 수줍게 시인했다.

"이 집엔 보일러가 없어요."

이럴 수가. 로이스는 충격에 빠졌다. 보일러가 고장이 난 것도, 가스비를 못 내서 끊긴 것도 아니고 애초에 보일러가 아예 없다니? 이게 집이야? 벽장이지!

"어떻게 살아요! 보일러 없는 집에! 말이 돼!"

비명을 지른 로이스에게 클락은 부드럽게 말했다.

"난 추위 안 타서 괜찮은......"

"내가 안 괜찮아!"

폭발한 로이스가 벌떡 일어서서 방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대여섯 걸음쯤 가면 책상에 다리를 부딪치고, 방향 바꿔서 다시 세 걸음쯤 가면 침대에 닿았기 때문에 빙빙 도느라 더 정신 사납고 분주했다. 이럴 때 말 걸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클락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을 그러던 로이스는 겨우 진정이 됐는지 뚝하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식탁 옆에 놨던 쇼핑백 안에서 곱게 포장된 꾸러미를 꺼내 내밀었다. 옛다 선물. 클락은 감탄을 연발하며 꾸러미를 풀어보았다. 보송보송 부드러운 캐시미어 목도리다. 살짝 만져 본 클락이 다시 로이스를 향해 목도리를 내밀었다.

"해 줄래요?"

로이스는 기꺼이 목도리를 받아서 클락의 목을 휙 휘어감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아무 저항 없이 로이스가 원하는 대로 다가온 클락은 유순한 얼굴이었지만, 아직도 로이스의 미간은 좀 구겨진 채였다.

"클락 켄트."


"네, 로이스."


로이스가 속삭였다.


"진짜 이사 안 할래요? 어디냐면 11번가로. 거기 아주 괜찮은 아파트 있는데. 회사에서도 가깝고요. 아마 클락도 어떤 집인지 대충 알 걸요. 몇 번 가 봤을 텐데?"

클락은 방금 들은 말을 곱씹어 보았다. 제대로 해석한 건지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으니 로이스의 입술이 한쪽으로 약간 삐죽거렸다. 로이스가 긴장했을 때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 그 표정을 본 클락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비로소 확실히 알았다.

"거기 보일러 있어요?"

묻는 클락의 얼굴에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삐죽거리던 로이스의 입술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로이스도 씩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요, 있죠."

"이 집보다 넓어요?"

"훨씬."

"계단 7층까지 안 올라가도 되고요?"

"엘리베이터 있어요."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클락은 고개를 약간 눕혀서 목도리를 쥔 로이스의 손등에 뺨을 살짝 부볐다.

"그 집에 로이스 레인도 있어요?"

"안 바쁠 때는요."

"그렇다면야."

클락은 더 묻는 대신 꽤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로이스는 지금 자기 표정이 바보 같을 거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따라 웃느라 입가가 너무 치솟아서 안면 근육이 아플 지경이었으니까.


그래서, 로이스는 클락의 목도리를 잡아 바싹 끌어당겼다. 여전히 웃고 있는 클락에게 입술이 닿을 때까지.


(201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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