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은 해가 갓 떠오를 무렵 대기권 최상층에서 내려다본 메트로폴리스가 어떤 모습인지 잘 알았다. 동쪽 저 편에서는 태양이 그날의 첫 햇빛을 보내고, 아직 지상의 도시는 얌전히 어둠에 싸여 있는 시간. 그림자가 진 땅 위에서 불빛은 조용히 반짝이고 이천만 시민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다. 그 모습을 홀로 내려다 볼 때의 기분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다. 슈퍼맨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그는 축 늘어진 뇌에 커피를 들이부었을 때의 느낌을 알 길이 없다. 클락의 신체는 차갑고 희박한 대기에서도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그 강력한 능력으로, 어떤 종류의 독성이든 흡수하자마자 흔적도 없이 분해해버렸다. 알콜이든 카페인이든 클락의 중추신경계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까 데일리 플래닛에서 두 블럭 떨어진 이 카페가 클락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로이스가 이 집의 커피를 제일 좋아한다. 회사로부터 평범하게 걸어서 갈 수 있는 범위 내의 가게 중에서는. 데일리 플래닛에서 가장 바쁘고 활기 넘치는 기자 로이스 레인이 점심 시간을 틈타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는 날은 흔하지 않지만, 어쩌다 그런 날이 생기면 클락도 로이스도 잠시동안 함께 여유를 부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로이스가 마실 아메리카노와 자기가 마실 카페라떼를 주문한 클락은, 이 가게의 고객 카드를 꺼내다 멈칫했다. 도장이 벌써 아홉 개나 찍혀 있었다. 열 잔 마시면 한 잔 무료로 드립니다.

  "다 찍으셨네요, 그럼 한 잔은 무료로 드릴까요?"

  앳된 얼굴의 점원이 계산대 너머로 상냥하게 물었다. 꾸물대다가 로이스한테 옆구리를 쿡 찔리고서야, 클락은 고개를 저으며 카드를 내밀었다.

  "아뇨, 그대로 계산해주세요."

  그러시든가요. 점원은 좀 의아한 것 같았지만 두말없이 헌 카드에 도장 열 개를 채우고, 새 카드에 도장 하나를 더 찍어 둘 다 클락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후 로이스가 커피 두 잔이 얹힌 쟁반을 들고 왔을 때 클락은 햇볕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도장 열 개가 빽빽이 채워진 카드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퍽이나 흐뭇해 보이는 얼굴이어서, 이 신참 기자에게 공사 양면으로 관심이 지대한 로이스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요?"

  빙그레 웃는 얼굴 그대로 클락이 고개를 들었다.

  "고객카드 도장 다 찍어 본 거 처음이에요."

  로이스는 원체 잘 놀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클락 켄트는 로이스의 제법 높은 수용 한도를 넘을 만한 말과 행동을 워낙 자주 했다. 이 정도 얘기야 클락의 평균에 비추어 전혀 예외적인 수준이 아니지.

  클락은 참 별 게 다 처음이었다. 지난주 취재 때 밝힌 바로는 비행기도 처음 타 보는 거라고 했다. 느려 터진 비행기 같은 건 당신에게 필요가 없어서였겠죠, 훨씬 빨리 날 수 있잖아요. 누가 들을세라 소곤소곤 묻자 클락은 덩달아 소곤소곤 대답했다. 아뇨. 저 날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 전엔 반은 걷고 반은 히치하이킹을 했었는데요.

  로이스는 두고두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개발한 그 어떤 비행체보다 빨리 날 수 있으면서, 그 어떤 비행기 사고에서도 흠집 하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으면서, 클락은 "첫" 이륙이 긴장되는지 승무원이 시키는대로 안전벨트를 야무지게 조이고는 양손으로 좌석 팔걸이를 꼭 잡고 있었다. 아주 진지한 얼굴로.

  "진짜 처음이에요? 하긴, 클락은 커피 자주 안 마시니까 도장 열 개 모으는 것도 일이겠지."

  로이스는 클락이 카페인이건 알콜이건 뭘 마셔도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별다른 기분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강철의 몸에도 조금은 안 된 구석이 있네요, 하고 로이스가 농담했을 때 클락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신 햇볕이 있어요. 구름 위까지 올라가서 햇볕을 받으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따뜻해지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게 술을 적당히 마신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로이스, 당신이 있어요. 당신과 손끝이 닿으면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빨리 뛰어요. 카페인의 효과도 아마 그런 것일 테죠.

  클락은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로이스가 짓는 미소가 좋았다. 로이스에게는 무슨 말이든 해도 괜찮다.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언젠가는 알아낼 사람이지만, 뭐든 되도록이면 직접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클락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전에는 단골 가게를 만들 만큼 한 곳에 오래 머물러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어요."

  그런 기대조차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에, 고객 카드 같은 건 애초에 어느 가게에서도 만들지 않았다.

  메트로폴리스에 오기 전에는.

  클락은 하나하나 모두 기억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홀로 밟아야 했던 그 많은 길을. 매번 다른 길이었지만 매번 똑같은 쓴 맛이 나는 길이었다.

  운이 좋을 때는 작별 인사라도 하고 가방 하나라도 챙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수습되지 못한 난리통을 두고 그대로 도망치듯 떠나야 할 때도 많았다. 반쯤 얼어붙은 비가 겉옷도 입지 못한 클락의 어깨를 하염없이 적시는 날도 있었다. 불길에 눌어붙은 옷에서 나는 탄내를 맡으면서 밤새 도로변을 걷기도 했다.

  그 길을 최소한 견딜 만하게라도 만들고 싶어서, 클락은 스몰빌을 제외한 어디서든 너무 정 붙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가짜 이름이나마 다정하게 불러 주었던 사람들,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풍경, 산맥 근처라서 상쾌한 냄새가 나던 공기, 3대째 이어내려온 비법으로 만들었던 애플 파이...... 결코 잊어버리지는 않겠지만, 두고 떠나야만 할 때도 너무 아프지 않을 만큼만 좋아해야지. 클락은 수도 없이 다짐했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되면 좋겠어요."

  호로록, 클락은 그만 보통 사람인 척 하는 것도 잊고 갓 나온 뜨거운 커피를 한 입 가득 머금었다. 로이스는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고, 클락과 그 어깨 너머 창 바깥의 분주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메트로폴리스. 로이스가 나고 자란 도시였다.

  그리고 이제는 클락이 머물기로 한 도시이기도 했다. 그 결심에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로이스는 함부로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용기가 보답받을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것은 앞으로 클락이 직접 알아내야 할 과제였다. 그러나 희망을 가질 수는 있겠지. 이번에는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머물 수 있기를. 아주, 아주 오랫동안이기를.

  로이스도 클락만큼이나 간절히 바라고 있다.



(2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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