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프롬엉클 1주년 일리야솔로 합작에 냈던 "1초"의 이후(?)입니다.

"1초"를 먼저...... 안 보셔도 별 상관은 없겠지만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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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문 잇속으로 신음을 삼키면서, 일리야는 끈끈하고 무서운 꿈에 호되게 걷어채여 쫓겨났다. 이리저리 흩어져 날아갔던 의식이 조각 조각 돌아오기 시작한다. 내내 버둥거리느라 긴 다리가 얇은 시트를 잔뜩 구겨 말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불쾌하고 족쇄처럼 차가운 감촉이었다.


  새벽 특유의 푸르스름하게 어두운 빛이 머문 방 안은 조용했다. 훅훅 내뿜는 한 사람의 바쁜 날숨만이 살짝 싸늘한 공기를 데우며 어지럽히고 있었다.


  일리야는 아직도 가늘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옆을 더듬었다. 달빛이 있으니 돌아보면 대번에 옆자리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일리야는 맞은편의 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내밀어 더듬어 보기만 했다. 없어. 역시 없어. 잠깐 동안 일리야의 혼란스럽게 휘저어진 머릿속을 비명 같은 깨달음이 채웠다. 마침내 그 비명이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려는 순간, 손끝에 웅크리고 누운 어깻죽지가 잡혔다. 따끈하고, 넓고, 단단하고, 살아 있는.


  혼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일리야는 비로소 방 안의 다른 것들을 인식했다. 일리야의 시선이 아무 의미 없이 가 닿던 벽에는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 개인의 침실에 걸려 있어서는 안 될, 공식적으로는 2차대전의 폭격 와중에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어느 대가의 그림이다. 평소에 일리야는 그림에 특별한 애착을 느끼는 일이 없었지만, 오늘 밤에는 이상할 정도로 크게 위안이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그림의 주인이자 이 집의 주인이며 일리야의 손에 멍 들기 직전인 어깨의 주인, 나폴레옹 솔로가 뭐라고 웅얼거리며 뒤척였다. 일리야가 자면서 부린 난동 때문에 끌려나간 시트를 잠결에 불만스럽게 잡아당기는 힘이 나른하게 미약했다.


  "쉬, 미안해. 더 자."


  일리야는 황급히 속삭이며 시트를 정리해 솔로의 맨어깨 위로 끌어올려 덮어 주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 긴장을 읽은 솔로가 작게 끙끙거리더니 한쪽 눈꺼풀을 반쯤 억지로 밀어올렸다.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힌 채였다.


  "또 악몽을 꾼 건가, 페릴?"


  일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졸음 때문에 평소와 다르게 서툰 솔로의 손이 천천히 일리야가 덮어 준 얇은 천 밖으로 빠져나와 일리야의 팔을 잡았다. 저 손이 모든 의지를 잃고 축 늘어진 채 시계를 느슨히 쥐고 있었던 것은 꿈일까? 아니면 지금 이것이 꿈일까? 일리야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와락 덮쳤던 생생한 공포감은 아직 그의 등골을 완전히 놓아주지 않았다.


  솔로는 부드럽게 팔을 잡아당겼고, 일리야는 순순히 거기에 따랐다. 등이 침대에 닿고, 곧이어 머리가 솔로가 베고 있던 지나치게 푹신하고 속이 잔뜩 든 베개 위에 놓인다. 너무 푹신한 베개는 척추 건강에 오히려 나쁘다. 일리야는 몇 번 충고했지만 솔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일리야는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구름 같은 깃털 더미 위로 깊이 빠져들었다. 얇은 시트는 바스락거리며 솔로가 데워 놓은 온기를 나눠주었고, 솔로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일리야를 감싸안아 헝클어진 금발머리를 가슴에 묻었다.


  "괜찮아, 일리야."


  일리야는 손을 들어 솔로의 가슴, 둥그렇게 암갈색 핏자국이 셔츠에 배어드는 걸 보았던 그곳을 만지작거렸다. 그 핏자국이 꿈일까, 아니면 이 흠 없는 살갗이 꿈일까. 맨살에 닿은 손가락이 차가운지 솔로는 흠칫거렸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무슨 꿈인지 물어도 될까?"


  일리야는 오래 망설였지만 솔로는 밀려드는 졸음을 물리치며 잠자코 기다렸다. 천하의 나폴레옹 솔로가 인내심을 기르도록 만들다니. 일리야는 아마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를 테지만, 솔로는 절대로 가르쳐 줄 생각이 없었다. 기다리면 일리야는 언제나 답을 준다. 있는대로 긁어 모은 솔로의 자그마한 인내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네가 나에게 시계를 돌려주던 날의 꿈이었다."


  "코드네임 U.N.C.L.E.의 첫번째 날 얘긴가?"


  솔로는 확인했다. 그는 졸음이 묻은 목소리로도 절대로 그들이 함께 속해 있는 기관을 "엉클"이라고 줄여 부르지 않았다. 솔로의 이상한 고집이 총력으로 발휘되는, 일리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이 사소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일들 중의 하나였다.


  "그게 어떻게 악몽이지, 좋은 꿈 아닌가?"


  이제 꽤나 제정신이 든 모양인지 솔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잘한 진동이 솔로의 가슴에 맞닿은 일리야의 뺨을 간지럽히고 일리야의 척추에 상한 꿀처럼 들러붙어 있던 마지막 두려움을 쫓아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정확히 일 년 전의 일로, 솔로는 아주 작은 세부 사항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U.N.C.L.E.가 결성된 첫 날의 일이다. 일리야는 솔로가 내민, 아니 내밀었다기보다 집어던진 화해의 선물에 생각보다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어지간한 솔로도 꽤나 당황할 만큼. 내가 선물로 누군가를 그 정도로 동요하게 한 적이 있었던가? 솔로는 원체 관찰력과 감각이 좋아서 언제나 환영받는 선물을 했다. 하지만 그날의 일리야는 유별나게-.


  "그날, 일이 그렇게 잘 되지 않았을 경우의 꿈을 꾸었다."


  일리야는 솔로의 품에 더욱 얼굴을 묻었다.


  "내가 더 빨랐어. 내가 너무 빨랐다."


  말 끝이 꾹 눌린, 정말로 소름끼쳐하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하지만 실제로는 자네가 나보다 훨씬 굼떴다네.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괴로워 하지?' 하고 놀리듯 묻는 대신 솔로는 일리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지난 1년 동안 솔로는 심술궂은 말을 조금 덜 하는 법을 배웠고, 일리야는 감정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오래된 나쁜 버릇을 조금씩 고친 것은 결국 서로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날 일은 정말로 잘 되었는 걸. 예측보다도 훨씬 더.


  솔로가 던져 준 시계를 받아들고 나서 일리야가 지은 표정을, 솔로는 잊을 수가 없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을 본 사람의 얼굴이었으니까. 알고 있던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고, 앞으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이 열리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일리야는 물었었다.


  "내가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알아?"


  "나와 같은 명령이었겠지, 필요하면 날 죽이고 디스크를 확보할 것."


  솔로가 CIA로부터 받은 명령 중에 내키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수준급으로 악취미적인 명령이었다. 그래서 솔로는 또다시 교묘하게 명령을 어기고 도박을 해 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너는."


  일리야는 입술을 떨었다. 그야 물론 일리야를 조금은 감동시킬 생각이었지만 이렇게까지는-.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해서, 솔로는 방 안의 감정 균형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며 그는 빙긋 웃었다. 그래도 일리야는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가 아니었고, 심지어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너를 쏘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지? 내가 단 1초만 빨랐어도......"


  "그러면 할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나는 대체로 운이 좋다네. 그리고 내가 워낙 극적인 것을 좋아해서,"


  "이 형편없는 스파이."


  확 터지듯이 분노가 끓어오른 덕분에, 일리야는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 이를 갈았다. 솔로는 그 급격한 태도 변화에 흠칫 놀라서 하던 말을 끊고 본능적으로 방어를 위해 손을 들었지만, 결국에는 짧고 부질없는 저항 끝에 멱살을 잡힌 채 침대에 메다꽂혔다. 빌어먹을 삼보 챔피언, 하고 솔로는 댓자로 뻗은 채 생각했었다.


  "그  따위로 가볍게 목숨을 걸지 마라."


  셔츠 깃을 잡은 일리야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가 숨통을 조여 왔다.


  "한 번만 더 별 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놓고 도박을 하려 들면, 네놈이 그렇게 가치 없이 여기는 목숨을 내 손으로 직접 끊어 주겠어. 그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깔끔하겠지."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도, 솔로는 그 말을 할 때 촛불의 중심부처럼 파랗게 불타던 일리야의 눈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일리야가 했던 말을 조금도 믿지는 않았다. 그 때도 그랬고, 지금은 더더욱. 자네가 절대 그렇게 못 한다는 쪽에 내 목숨을 걸지.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어 이 섬세한 영혼을 고통스럽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솔로는 잠자코 고개를 돌려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흘깃 보았다.


  "잠든 사이 날짜가 바뀌었군."


  일리야의 이마에 입술을 누른 채 솔로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해피 애니버서리, 일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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