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어디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지금 이 순간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일리야의 공식적인 대답은 이렇다. 정보원과의 접촉을 위해 잠입했던 파티에서, 이 나라의 부패한 실세가 총을 네 발 맞고 피를 뿜기 시작한 때부터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사실만을 전하는 일리야의 옆에서 솔로는 또 발뺌부터 하려고 들 것이 뻔했다.


 "우리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 초호화 파티에 총까지 가지고 숨어드는 데 성공한 저항군이 있을 줄이야. 웨이벌리조차 감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무모한 암살이 성공하다니. 아무튼 우리와는 관련 없는 일이고, 우린 그저 운 없이 그 장소에 있었을 뿐이죠."


 덕분에 파티장은 그 즉시 폐쇄되었고 혹시 있을 지 모를 잔당을 색출하기 위해 손님 한 명 한 명에 대한 철저한 신원조회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각각 프랑스인과 스위스인으로 기재된 위조 여권과 위조된 초대장을 가진 일리야와 솔로가 그 엄중한 절차를 통과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내 평생 수많은 불법을 저지르고도 잘 살아 남았건만, 정작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즉결로 총 맞게 생겼다니. 솔로가 농담을 하고 웃을 정신이 남아 있다는 건, 적어도 솔로의 생각으로는 아직 퇴로가 완전히 막히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솔로는 심각해진 일리야에게 호언 장담을 했다. 내가 아까 봐 둔 고용인 통로가 있어. 빨리 움직인다면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을 거야. 일리야는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또 솔깃하고 말았다.


 들키지 않기는. 결국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호화 저택 담장을 넘다가 솔로는 오른팔을 부러뜨렸으며, 지금 이 나라 방방곡곡에 둘의 인상착의를 상세하게 그린 수배전단이 나붙은 판이다. 하지만 적어도 목숨은 붙어 있고 둘 중 누구도 걱정할 만한 큰 부상은 당하지 않았다. 진땀을 쏙 빼놓는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까지 했으니, 벌어진 사태의 심각성에 비하자면 그들은 앞으로의 전망을 비교적 낙관하고 있었다.


 아직 국토개발이 덜 이루어진 이 나라에는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숲이 많았다. 엉클은 이번 작전의 무대가 된 도시 근처 장장 수십 킬로미터 규모로 우거진 숲 속에 은신처를 하나 보유하고 있다. 작은 오두막집은 지은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이번 작전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식량이나 발전기, 통신장비 등 기본 물자를 새로 구비해 놓은 상태였다. 일련의 사건 끝에 일리야와 솔로가 이곳에 처박히게 된 불행한 사실도 웨이벌리에게 정확히 보고했으니, 꼼짝 않고 납작 엎드려 버티다 보면 누군가는 데리러 올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렵네. 자네들이 목격한 바대로 국가비상사태라 경계가 심하거든. 잠잠해지면 데리러 가지. 되도록 식량이 소진되기 전에 가도록 노력해 보겠네. 웨이벌리는 아무것도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상사였다. 이리하여, 엉클의 성공적으로 실패한 이번 작전은 대략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정말로, 어디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그러나 같은 질문에 대하여, 이번 작전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일리야는 좀 더 솔직하고도 근본적인 대답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보고서에 쓸 수 없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솔로. 저 가증스럽고 괘씸하고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 나폴레옹 솔로를 만난 후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공적으로, 사적으로.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일리야는 비단 이번 작전뿐이 아니라 요즘 들어 어쩐지 인생 전체가 예상을 벗어나 꼬이기 시작했다는 불길한 감각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스파이 인생에서 작전이 실패하는 정도야 새삼 특이한 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나폴레옹 솔로의 존재는 그야말로 예상 밖이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기막힌 것이었으며 일리야는 이 가공할 인물에 대해 전혀, 조금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윽, 냄새가 지독하군. 이게 뭐지, 러시아에서는 면도용 비누를 돼지 비계로 만드나?"


 일리야가 만난 최악의 재앙, 밉살스러움의 화신, 다른 이름로 하자면 나폴레옹 솔로가 목을 움츠리고 콧잔등에 가느다란 주름을 잡으며 또다시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있었다. 오른팔에 일리야가 대 준 임시 부목을 하고 있지 않았으면 그쪽 손으로 코를 움켜잡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솔로의 멀쩡한 쪽 손에 들린 '지독한' 냄새의 비누로 지금까지 잘만 면도해 왔던 일리야는 이 모욕적인 평가에 발끈했지만, 그가 뭐라 응수하기도 전에 솔로는 비누를 테이블 위에 함부로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비누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일리야가 깨끗한 천 위에 펼쳐둔 나머지 면도 도구를 까다롭게 살피는 솔로의 눈길이 이번엔 비누거품을 내는 면도솔에 닿았다. 오래되어 약간 털이 갈라진 물건이다.


 "면도솔도 돼지털이지?"


 그 작고 둥근 솔에 갑자기 이빨이 돋아 깨물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대단히 꺼리는 태도로 털을 한 번 쓰다듬어 본 솔로는 쯧, 탐탁치 않은 소리를 냈다.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건 면도칼이야. 안전면도기라니 유치하게......"


 "도대체 뭐가 문제냐."


 드디어 일리야의 코에서 씩씩 거친 숨이, 입에서는 꾹 억누른 목소리가 나왔다.


 "뭐가 됐든 네 그 지저분한 수염을 밀 수만 있으면 되지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


 "아, 그러면 관두세나."


 솔로는 툭 던지듯 말하고는 다시 푹 꺼진 소파에 냉큼 드러누웠다. 그 꼴을 보는 일리야의 심장 근처에서 다시 화르르 불이 붙었다. 그 불을 끄는 데는 장장 1분간의 명상이 필요했다. 나폴레옹 솔로를 영원히 내 인생에서 제거하는 것만이 더 큰 혼돈과 악몽을 막아낼 유일한 방법이 아니겠냐는 강한 충동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윗입술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일리야는 말했다.


 "면도 하기로 했잖아. 팔이 부러진 게 문제라면 내가 면도를 해 주겠다고......"


 "저런 걸로는 안 해!"


 솔로의 덥수룩해진 수염 속에서 입술이 얄밉게 삐죽였다. 본래는 윗입술 선이 아주 뚜렷하게 생겼는데 지금은 자란 수염에 덮여서 다 흐릿해졌다. 그걸 보는 일리야의 마음은 또다시 못마땅함에 휩싸였다.


 일리야는 언제나 솔로가 유난을 떨며 깃털 정리를 하는 새 같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덩치가 엄청난 새라고 해야겠지. 진짜 새들은 깃털 정리를 할 실용적이고 필수적인 까닭이 있지만, 솔로는 그야말로 쓸 데 없이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여 몸을 세심하고 아름답게 다듬었다. 참으로 허영심이 많고 얄팍한 인간이라고 일리야는 몰래 솔로를 업신여겼다.


 하지만 오두막에 고립되어 며칠 지나는 동안, 솔로는 여기서는 더운 물도 쓰기 힘든 데다 만날 사람이라곤 일리야밖에 없고 팔마저 부러져 불편하다는 핑계로 그 모든 노력을 놓아 버렸다. 겨우겨우 부족한 물로 씻기는 했지만 수염도 내버려 두고 머리카락에도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일리야는 내심 놀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는 참지 못하는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몸단장 못 하는 상황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 결과로 솔로의 얼굴 절반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고, 일리야가 짐작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이마를 덮었다. 저렇게까지 곱슬머리였다니. 아침마다 머리에 뭘 처덕처덕 바르고 빗질을 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는 걸 앞으로는 이해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머리카락은, 그래, 뛰어노는 어린애들 머리카락이 그렇듯 천진난만하고 고슬고슬하게 흐트러진 게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얼굴 절반, 뺨의 상당 부분과 턱을 다 뒤덮은 수염이다. 영 지저분하고 거슬렸다. 없애버리고 싶어. 솔로가 전에 없이 부스스한 꼬락서니로 푹 꺼진 소파에 드러누워 소일하는 꼴을 보는 일리야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끓었고, 손가락은 가상의 적 멱살을 잡기라도 하는 듯이 꿈틀거렸다.


 저 악랄하고 재앙에 가까운 인사가 심지어 아름답지도 않다면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나마 꼴이 보기 좋아서 참아 줄 만 했던 것인데. 이젠 지저분하고 못생긴 데다가 여전히 재앙이라니. 이대로 이틀만 더 지나면 일리야는 솔로의 목을 졸라버릴지도 몰랐다.


 결국 이런 복잡한 이유로, 일리야는 파국을 막기 위하여, 솔로에게 면도를 해주겠다는 제안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 네 감사합니다 하고 얌전하게 있을 것이지. 솔로는 자기 수염을 면도할 기회를 일리야에게 준 것이 크나큰 은혜라도 베푸는 일이라는 양 온갖 까탈을 부리고 있었다.


 "난 이 따위 것 쓰지 않아. 차라리 수염을 내버려 두고 말지. 수염을 좋아하는 사람도 세상에 많다고."


 "여기에는 나 뿐이고 나는 그게 전혀 좋지 않다."


 일리야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시각적 불쾌감을 표현했다. 그러자 솔로는 동그래진 눈으로 한동안 일리야를 쳐다보았다. 좀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솔로는 일리야의 방금 발언에 대해 뭔가 말하려는 기색을 보이다가,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지 다른 이유를 추가했다.


 "그리고 내 피부가 얼마나 예민한지 아나. 이런 걸 갖다 댔다간 당장 난리가 날 걸."


 솔로는 다치지 않은 왼손을 들더니, 단지 깨지는 걸 보고 싶다는 사악한 이유로 유리컵을 밀쳐 떨어뜨리는 고양이처럼 일리야의 면도용 비누를 톡 밀쳐버렸다. 말릴 새도 없이 비누가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본 일리야가 입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 일리야가 간당간당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솔로가 말했다.


 "이건 싫으니까, 내 면도 도구들 가져 와. 내 걸로 해 줘."


 어쨌든지, 아무리 까탈을 부리고 못된 소리를 했든지간에 결국 면도를 하겠다는 것이다! 솔로가 또다시 그 지조라고는 없는 마음을 바꿔먹을까 겁이 난 일리야는 모든 악감정을 일단 제쳐 두기로 했다. 솔로의 수트케이스가 있는 방으로 뛰쳐들어가 솔로가 일러준 대로 붉은색 가죽을 댄 면도 도구 케이스를 가져온 것이다. 솔로가 그 생김새를 잘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일리야는 결코 이것이 면도 도구를 넣어 둔 상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리야의 눈에는 꼭 어느 공작 부인의 결혼 예물을 넣어 두는 상자처럼 보였다.


 솔로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일리야는 잠금쇠를 당기고 뚜껑을 열었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솔로의 면도 도구들은 케이스 안에 꼭 맞게 가지런히 정리되어 들어 있었다. 케이스를 열자마자 연하게 나는 냄새는 일리야가 구별할 수 없는 종류의 식물과 사향,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알맞은 배합으로 섞인 것이었다. 아마 하얗고 말끔한 도자기로 된 갑 안에 든 비누에서 풍기는 향이겠지. 매끈한 나무 손잡이가 절묘한 곡선으로 깎여 손에 딱 들어맞게 생긴 면도솔은 그 털이 갓난아기 볼에 마구 문질러도 자극이 되지 않을 만큼 부드럽다. 그리고 면도기는 잘 관리된 일자면도기였다. 예전에 일리야의 부친이 쓰던 것 같은, 고풍스러운 모양의 은으로 된 손잡이에는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홀린 듯이 예쁘장한 면도 도구들을 내려다보며 감탄한 기색이 역력한 일리야 옆에서 솔로가 뿌듯해하는 투로 설명했다.


 "솔은 실버팁 배저 털이야. 오소리 털 중에서도 가장 부드럽고 균일하다네."


 그러나 일리야를 가장 감탄시킨 것은 비싼 오소리 털로 된 솔이 아니었다. 손을 뻗어 면도칼을 집어든 일리야는 접혀 있던 날을 펴 보았다. 반 뼘 길이, 아주 예리한 날.


 "날 관리를 제법 잘 했군. 무뎌지기 전에 백 명 정도는 우습게 베겠는데."


 솔로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날이 잘 서 있어야 오히려 자극이 적지."


 그 말에, 일리야는 새삼 이것이 적진에서 백병전을 벌일 때가 아니라 면도를 위한 도구임을 상기해냈다. 그렇다고 이걸로 사람을 죽이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말 내가 이 칼로 면도해 주길 바라?"


 "당연하지, 다른 칼은 얼굴에 대고 싶지 않아."


 "그럼 목을 내놓고 여기 앉아라."


 일리야가 반쯤 농담으로 험악한 소리를 하는데도, 솔로는 드물게 별 이의 없이 일리야의 말을 따라 진작에 준비해 둔 의자에 자리를 잡고는 배 위로 얌전히 손을 깍지 꼈다. 임시 부목을 댄 팔이 좀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금방 부러져 엄살을 떨던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 보였다.


 일리야는 문제의 실버 뭐라나 하는 동물 털로 만든 솔을 따뜻한 물에 적셔서 향기 나는 비누 위를 원을 그리듯 문질렀다. 그러자 단단했던 질감에 비해서 깜짝 놀랄 만큼 빠르게 하얗게 녹아난 비누가 부드러운 털에 엉겨붙는다.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둥근 면도용 그릇에 비누 묻은 솔을 옮겨 물을 조금 더 떨구고 일정한 속도로 저으니 금세 작은 그릇을 가득 채우도록 흰 거품이 피어올랐다. 거품은 아주 부드럽고도 공기가 지나치게 섞이지 않아서 쉽게 꺼지지 않을 성 싶었다.


 좋긴 좋네.


 입 밖으로 중얼거릴 뻔한 것을 꾹 눌러 참으며, 거품을 잔뜩 묻힌 솔을 들고 일리야는 솔로를 향해 돌아섰다. 솔로는 씩 웃더니 보란 듯이 턱을 치켜올렸다. 언제 보아도 놀라울 만큼 잘 조형된 턱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덥수룩하게 길어진 수염에 상당 부분 가렸지만 그래도 그 너머의 턱선이 어떤지 일리야의 눈은 꽤 정확히 기억했다.


 일리야는 솔로의 뺨과 코 아래, 턱, 그리고 턱 아래까지 살살 거품을 펴발랐다. 어찌나 부드럽고 균일하게 거품이 솔로의 얼굴을 둘러싸는지. 문지르는 손까지 기분 좋은 순한 자극이 전달되었다. 일리야는 솔로의 턱 가운데 살짝 패인 부분에도 빠짐없이 거품이 묻도록 신경 써서 위아래로 한 번 더 쓸었다. 그곳은 마치 솔로가 말랑말랑한 진흙으로 갓 빚어져 아직 촉촉하게 무르던 시절에, 신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러 특별히 표시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생겼다. 신의 눈에도 개중에 좀 더 잘 된 작품이 있을 테니까.


 "어째서 얼굴을 붉히지, 페릴."


 솔로가 느긋하게 물었다. 자기가 그런 줄도 몰랐던 일리야는 흠칫 솔을 멈추었다.


 "이러고 있는 내 꼴이 비참하고 치욕적이라서 그렇다."


 "저런, 그럼 그만 둘까? 나도 동료에게 그렇게 스트레스 주기는 싫은데."


 놀리는 듯한 솔로의 목소리에, 일리야는 대답 대신 솔을 내팽개치고 은 손잡이가 달린 면도칼을 집어 날을 촥 폈다. 의사 전달이 되긴 됐는지 솔로는 더 이상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 칼로 백 명의 목도 벨 수 있겠다는 일리야의 감상은 농담이 아니어서, 빛에 비춰 보니 섬뜩하게 새파란 빛이 칼날에 흐른다. 이런 칼로 면도를 해달라니. 일리야는 여전히 고개를 젖히고 기다리는 솔로의 얼굴을 흘깃 살폈다. 일리야는 이렇게 아무런 안전 장치가 없는 일자 날로 남의 수염을 깎아 본 일이 없었다. 비슷한 칼로 사람을 베어 본 적은 있다. 살기 위해서였고 일리야는 목적을 이루었지만, 그 상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지금도 몰랐다.


 마른침을 삼킨 일리야는 수염이 난 부위 중에서는 다쳐도 가장 덜 치명적일 것 같은 솔로의 볼 위로 살짝 칼날을 대 본다. 이런 날이라면 사람 살갗 정도는 버터 나이프로 적당히 녹은 버터를 자르는 것만큼이나 쉽게 파고들 것이었다. 힘도 딱히 들지 않겠지. 날의 무게와, 날에 닿은 솔로의 뺨 감촉에 잠시 익숙해지도록 잠시 기다린 일리야는 솔로의 귀 옆, 구레나룻이 시작되는 부분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날을 살짝 밀자 섬세한 거품과 좋은 면도날의 조합 때문인지 밀리는 소리가 거칠게 나지 않았다. 갓 닦아놓은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는 스케이트 선수 같다.


 기분이 좋잖아.


 밀리는 느낌이 매끄러운 데다가 어쩐지 재미까지 있었다. 일리야는 조심조심 거품이 맺힌 솔로의 뺨을 본격적으로 밀기 시작했다. 짧고 조심스럽게. 칼날 위에 엉긴 거품과 잘려나온 수염은 가끔씩 옆에 펴 놓은 마른 수건에 문질러 닦는다. 면도날이 스쳐지나간 곳마다 원래의 뽀얗고 반들반들한 살갗이 드러났다. 마치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나, 귀금속을 세공하는 기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고도로 집중해서 한쪽 뺨을 반쯤 밀었을 때, 솔로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광대뼈 근처가 웃음 때문에 볼록 솟아올랐고, 매끄러워진 뺨의 근육도 떨렸다. 일리야는 화들짝 놀라서 면도칼을 떼어내며 낮게 욕설을 뱉었다.


 "움직이지 마라!"


 "바싹 밀어야지, 페릴. 별명에 걸맞지 않게 그게 뭔가. 그루터기가 다 남겠어."


 솔로의 동그랗게 솟아오른 광대가 내려가질 않았다. 비누거품 사이에서 얄미운 입이 계속 나불거렸다.


 "떨지나 말고. 뭘 그렇게 긴장을 하나. 칼을 다뤄 본 적 없는 것도 아닐 텐데."


 물론 일리야는 칼을 다뤄 보았다. 그러나 그가 꾸준히 받아 온 훈련은 이처럼 무언가를 더 곱게 다듬고 가꾸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리야는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긴장한 것이었다.


 "누가 떨었다고 그러나? 손에 맞지 않는 칼이라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내 얼굴에 생채기라도 날까 봐 무서운 게 아니고?"


 "그 입 가만히 두지 않으면 얼굴 가죽까지 다 벗겨버릴 테니 작작 하는 게 좋을 걸."


 솔로가 웃느라 훅 공기를 불어낸 탓에 입 주위에 있던 거품이 가볍게 떠올랐다. 일리야는 거품 투성이인 솔로의 턱을 잡아서 거칠게 돌렸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선의 턱뼈가 손에 닿는 감각에 혼자 놀란 일리야는 얼른 손을 뗐다. 그러나 망설이다가 정작 칼날을 얼굴에 다시 갖다대는 손길은 여전히 깃털처럼 가벼워서 솔로의 미소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일리야는 모르는 척 부지런히 면도를 계속했다. 글쎄, 정말로 부지런히 한 걸까. 훈련받은 생활 습관대로, 평소 자기 자신의 수염을 효율적으로 재빠르게 다듬을 때와 같이 진정 부지런했다면, 아무리 익숙하지 않은 도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면도는 진작에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일리야는 바늘로 한 땀 한 땀 수라도 놓듯이 짧게 칼날을 움직이며 조금씩 조금씩, 맛있는 음식을 아껴가며 먹듯이 갉작이고 있었다. 솔로의 나무랄 데 없는 얼굴 생김새, 입체적으로 들어가고 솟은 단단한 골격, 그 위를 덮은 피부까지 형태와 질감이 일리야의 집중한 손끝에 차근차근 새겨졌다.


 일리야가 코 아래로 슬쩍 칼날을 대자 솔로가 윗입술을 안쪽으로 말면서 인중이 좀 더 팽팽해지게 우스운 표정을 했다. 좀 더 편하게 면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손가락 끝에 솔로의 일정하고 평화로운 숨이 달착지근하게 달라붙었다. 슬쩍 시선을 들자 솔로는 낮잠이라도 든 듯이 얌전하게 눈을 감고 있다. 수염보다 훨씬 섬세하고, 살짝 말려올라가 끝이 날아갈 것 같은 속눈썹이 짙게 내리닫혀 있었다. 입가를 다듬을 때 솔로는 입술을 오므려 역시 그쪽 피부가 팽팽해지도록 했다. 마치 다섯살짜리 어린애가 어머니의 입가에 키스하려고 할 때 만들 법한 입모양이었다.


 반대편 뺨을 밀 때는 그새 숙달이 되었는지 처음보다 속도가 더 붙었다. 점점 남은 수염이 줄어들면서 일리야는 얼핏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턱을 좀 더 들어라."


 남은 것은 턱 아래의 짧은 수염들이다.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하지. 피부 속으로 중요한 혈관을 조금만 깊게 베어도 생명이 위험하다. 그래서 일리야는 숨을 죽인 채 어느 순간보다도 집중해서 임무에 임했다. 일리야에게 연약하고 치명적인 부분을 고스란히 맡긴 솔로의 가슴은 오히려 일리야보다 훨씬 차분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옷에 거품이 묻지 않도록 덮어둔 수건 너머로도 그것이 느껴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자네 내 얼굴을 아주 좋아하지? 수염이 얼굴을 가리는 게 싫은 거잖아."


 한동안 얌전히 있나 싶더니,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무렵에 솔로는 뜬금없이 물었다. 일리야의 손이 삐끗했고, 덩달아 칼날이 미끄러져 살갗을 아주 얇게 베었다. 목의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으로 치우친 지점이었다. 젠장, 일리야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었고, 곧 피가 조금 스며나서 하얀 비누거품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괜찮아, 아주 조금 베였어. 그다지 아프지도 않다네. 자네가 돌팔이 솜씨로 맞춰 놓은 이 팔보다는 훨씬 덜 아파."


 일리야는 깨끗한 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잠깐 누르고 있다가, 입을 꾹 다물고 마무리를 했다. 이제 칼질 두어 번이면 끝이다.


 "그리 부끄러워 할 것도 없어, 내 얼굴의 생김새를 좋아하는 거야 곰이 꿀을 좋아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자연 현상에 가까운 거야."


 일리야는 솔로의 이 끝없는 자신감에 그만 기가 막혀서 숨을 훅 터뜨리고는 칼을 곁에 둔 수건에 마지막으로 닦은 후 고개를 들었다. 눈을 뜬 솔로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자네 얼굴을 꽤 좋아하는 걸."


 마치, 아이스크림이라면 바닐라가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게가 없는 말투였다. 일리야는 안도인지 실망인지, 조금 긴 숨을 뱉었다. 그러나 솔로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마음에 드는 것이 과연 얼굴만인가, 라네."


 일리야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솔로의 옷에 거품이 튀지 않도록 보호하던 수건을 들어 솔로의 얼굴에 남은 비누거품을 말없이 닦아내 주었다. 할 말을 마쳤는지 솔로는 밉살스러운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다.


 얼굴을 대강 닦아내고 수건을 치운 일리야는 문득 손을 움직여 방금 전에 생긴 솔로의 목 위 상처, 아까 닦아냈는데도 새로 피가 실처럼 가늘게 돋은 것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훔쳐냈다. 잠시 멈칫했다가, 일리야는 손을 떼는 대신 솔로의 귀 밑에서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 내려온 턱 바로 아래를 지그시 눌러 본다. 이제 수염이 깎여나가 매끈해진 얇은 살갗 너머로 혈관이 두근거리는 것이 생생했다. 일리야의 다른 쪽 손은 아직 칼을 쥐고 있었다. 이렇게 날카로운 칼이라면 세 살짜리 어린애 힘으로도 중요한 혈관을 단번에 끊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 숨이 멎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는 자기 결정으로 일리야에게,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았을 때조차 위험한 일리야에게 날카로운 칼을 맡기고 온순하게 목을 내밀었다. 일리야는 잠시 이것이 솔로의 허세 중 하나일까, 용기를 과시하려는 심산인가도 생각했지만......


 그러나 솔로의 맥박은 평온하다. 1분에 70번.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거짓말쟁이라도 이런 신체적 반응을 속일 수는 없다. 허세가 아니라 솔로는 정말로 일리야가 자기 목숨을 쥐고 있는 상황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의 솔로는 말수가 아주 줄어든다. 솔로를 진정으로 닥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진짜 죽을 것 같은 위기에 몰아넣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솔로는 평소처럼 쾌활하고도 짓궂은 투로 계속 일리야를 자극하고 있다. 목숨이 걸렸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이.


 "조금도 불안하지가 않나?"


 일리야는 불쑥 물었다.


 "내가 이걸로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알잖아."


 나는 러시아인이고, 자네는 미국인이지. 서로 목을 조르고 총을 겨눈 지 고작 서너 달이 지났을 뿐이야. 이상한 운명의 장난으로 지금은 파트너라고 부르지만, 글쎄.


 그러나 솔로는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알지. 내 수염을 예쁘게 깎아 주었잖아. 나쁘지 않았어."


 일리야는 동맥 위를 누른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저항하듯이 목 안쪽의 혈관이 보내는 두근거림이 더 뚜렷하게 검지와 중지 끝에 부딪쳤다. 아주 중요하면서도 터무니없이 약한 박동이었다. 그것이 어쩐지 애처로워서 일리야는 잠자코 그대로 있었다.


 "자네 손에 칼이 쥐어졌든, 총이 쥐어졌든, 질긴 올가미가 쥐어졌든, 혹은 아무것도 없든 마찬가지지."


 솔로가 다시 말을 시작하자, 그의 목을 감싸고 있는 일리야의 엄지손가락 근처에서 성대가 벌새처럼 간지럽게 진동하는 것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글쎄, 아마도."


 솔로는 여기서 잠깐 말을 멈추었다. 일리야는 두 손가락으로는 솔로의 동맥을 누른 채, 엄지손가락으로는 솔로의 목 가운데 도드라진 연골을 천천히 더듬으며 그가 말을 잇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 모든 위험 요인에도 불구하고, 자네를 믿어 버리게 되었나 봐."


 그 말을 할 때 솔로의 성대는 조금 더 가늘고도 빠르게 떨렸고, 검지에도 조금 빠른 박자가 뛰놀았다. 일리야는 그것에 매혹되어 아주 숨을 멈추었다. 솔로의 말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이 입이 가벼운 미국인이 언제 진실을 말하는지 일리야는 모른다. 지금 이것도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그런 말을 하면 일리야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되리라는 걸 솔로답게도 교활하게 알아차려서 하는 말일지도.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솔로의 목을 가만히 감쌌던 일리야의 손이 거침없이 위로 밀려올라갔다. 목, 턱, 매끈해진 뺨까지. 비눗기가 조금 남아 미끄러운 피부를 쓸어올리면서, 일리야는 다른 손에 아직까지 들고 있던 칼을 내던지고 그 손으로 반대편 뺨마저 단단히 붙들었다. 드디어 수건이나 칼날 같은 시시한 핑계 없이 마음껏 살로 살을 문지르며 일리야는 몸을 바싹 기울였다. 코 끝에는 성분을 일일이 알 수 없는 복잡한 향이 풍기고 혀에서는 쌉쌀하고 조금 매운 맛이 감돌았다. 아무리 향이 좋고 부드러운 거품을 내는 비누라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 맛까지 달콤하지는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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